정보기술 분야 남북한 교류·협력이 본격화되면서 그동안 정치적·사회적 분위기에 가려 있던 기술적인 문제들이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반세기 분단 깊이만큼이나 서로 다른 기술방식과 언어정보처리 환경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기술적 문제에 대한 해결은 앞으로 남북한 IT협력은 물론 통일작업 과정에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시급한 일이다. 또한 남북간 균형적인 IT 분야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정보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과제다.
◇남북 언어정보처리 표준화=남북 정보기술 교류는 합작회사까지 설립해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정작 컴퓨터에서는 문서 한 장조차 호환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남북이 서로 다른 언어정보처리체계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고 지난 94년부터 열린 ‘코리안 정보처리 국제학술회의(ICCKL)’에서 컴퓨터 자판·부호계·로마자 표기·정보기술 용어 등의 남북 표준안을 모색해왔다. 이런 노력 끝에 지난 2월 중국 옌지에서 열린 ‘2001년 제5차 코리안 정보처리 국제학술회의’에서는 언어·로마자 표기·부호계·자판·정보기술용어 분야에서 남북한·중국간 합의서가 만들어졌다.
우선 언어부문에서 국제표준화기구(ISO) 등 국제기구에 등록하기 위한 글자의 명칭은 ‘정음(JEONGEUM)’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ISO에 등록하기 위한 자모배열 순서는 지난 96년 제3차회의 합의안을 기초로 옛글자와 현대글자를 섞어 배열키로 했다.
자판부문의 경우 남북은 지난 96년에 합의한 2벌식 자판 공동안에서 옛글자 4자(△, ㆁ, ㆆ, ·)를 제외한 자판을 공동안으로 합의하고 테스트를 추진할 방침이다.
특히 정보기술용어부문에서 남북은 용어 표준화를 위해 ISO에서 제정한 용어집 ISO2382에 멀티미디어·인공지능(34편까지) 등의 분야를 포함시켜 우리말 용어와 해설을 담은 ‘국제표준정보기술용어사전’ 증보판을 2002년 중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전문용어 표준화 대상은 ISO2382(표준화 과정 중인 용어도 포함)와 기타 정보기술 관련 분야 용어로 정했다.
이를 위해 용어 분야 남측 책임자인 최기선 한국과학기술원 교수팀은 북한 측 책임자인 리수락 교육성 프로그람교육쎈터 소장으로부터 최근 전문용어 초안을 넘겨받아 조절작업을 하고 있다.
남북간 논란이 많은 로마자 표기(ISO11941 전자법)부문의 경우 남북한 학자들은 모음자 표기와 자음자 표기(ㄴ·ㅁ·ㅇ·ㄹ·ㅅ·ㅆ·ㅈ·ㅊ·ㅎ)에서는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는 한편 자음 중 차이를 보이는 ‘ㄱ·ㄲ·ㅋ·ㄷ·ㄸ·ㅌ·ㅂ·ㅃ·ㅍ·ㅉ’ 등에서 향후 공동안을 마련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남북한 학자들은 언어정보처리 표준화와 관련된 연구를 공동추진하기 위해 지난 8월께 중국 옌지에 ‘정음공학연구센터’를 설립했다. 또한 남북한 학자들은 오는 2월 말께 중국 선양에서 제6차 학술회의를 갖고 언어정보처리 통일방안 마련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의할 예정이어서 결과가 주목된다.
이에 앞서 남한 학자들이 최근 남북 언어정보처리 표준화 기구(준비위원장 최기선 한국과학기술원 전문용어언어공학연구센터 소장)을 구성키로 함에 따라 남한 내부적으로도 표준화 작업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간 통신교류 및 북한 통신망 현대화=남북한간 정보통신 교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의 통신망을 연결하고 북한 지역의 정보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남북한간 정보화 연계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남북한 통신의 통합이 필수적이다.
남북간 통신통합을 위한 교류단계는 △통신망 구축 △통신망 확장 △통신통합 순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먼저 남북 교류 환경 조성을 위한 통신망 구축 단계에서는 남북한 두 지점을 전용회선으로 연결하고 접촉점을 확대하는 것이다. 북한 특정지역과의 통신회선 연결 범위는 전용회선 수준을 넘어선 지역교환망 접속 수준으로 확대한다. 무역전용회선의 경우 준공공기업을 통해 추진하되 민간기업의 경협 사안별 부대사업으로서의 교류는 적극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특히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남북 교류단계에 접어들면 남북간 통신망을 연결하고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남북한 당국자들과 통신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남북한 통신위원회(가칭)’와 같은 공동기구의 구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 2단계로 통신망 확장단계는 남북한간 공동생산이 본격화하면서 전용회선에 대한 수요가 증대될 경우 공중통신망 접속을 추진한다. 또 전용회선 형태의 전화는 물론 팩시밀리·텔렉스 등을 연결해 서비스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또 북한 내 접속점까지의 회선용량 확대를 위해 광케이블과 마이크로웨이브 망을 구축한다.
마지막으로 남북한 정보화 연계체제 구축을 위한 통신통합단계에서는 단기적으로 판문점-평양 구간의 통신회선 용량을 증대시켜 늘어나는 통신수요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또 장기적으로는 북한 지역의 관문국을 판문점에 가까운 개성에 설치해 평양을 경유하지 않고도 북한의 여타 지역과 연결되도록 통신선로를 구성하는 방안도 모색돼야 할 것이다.
3단계에서는 또 북한 주민들의 통신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입자망의 구축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윈도의 조선글화=북한이 추진 중인 ‘윈도의 조선글화’는 ‘한글(남)’과 ‘조선글(북)’의 정보처리 환경의 간극을 더욱 벌리면서 IT통합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사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정보처리 방식에서 ‘한글’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조선글’ 윈도가 개발돼 나온다면 한글과 조선글 사이의 괴리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그동안 영문 윈도95·98 버전에서 조선글을 입출력할 수 있도록 개발한 다국어 입력프로그램 ‘단군’를 얹어 써왔다. 그러나 MS의 윈도2000 프로페셔널이 발표되면서 기술적 까다로움 때문에 입출력 장애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윈도를 조선글화하려면 필수적으로 저작권자인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가 해당국가의 아이디(로컬ID)를 부여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한은 MS 측에 국가코드 부여를 요구하는 한편 남한에도 MS를 설득할 것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윈도의 국가 ID 배정문제는 미국 행정부가 기술지원에 부정적 입장을 보임에 따라 표면화된 지 1년이 다 되도록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윈도의 조선글화는 IT교류협력에 있어 최대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조선글 윈도가 등장하게 될 경우 문법체계와 서로 다른 코드페이지를 지니고 있는 한글과 조선글의 고착화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북 IT교류협력 확대를 위해서는 북한의 정보기술 수준과 개발환경 향상도 필수적이다.
남한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북한 측이 남한의 한글 윈도를 받아들이는 게 이익이고 해결방안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나 북한 측은 자체 개발한 기술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사안은 남북 당사자들은 물론 국내 전문가와 관련 기관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인터뷰> 김주진 KT 통신망연구소 실장
남북한 정보통신 교류방안을 연구해온 김주진 박사는 최근 북한지역 통신망 현대화 전략을 발표한 바 왔으며 이를 위해 ‘남북IT교류위원회(가칭)’와 같은 공동기구 설립을 주장한 바 있다. 그를 만나 남북 통신교류 및 통합의 필요성과 방안 등에 대해 들어봤다.
―남북한 통신교류와 협력의 기대 효과는.
▲일차적으로 북한이 필요로 하는 통신 인프라를 개선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남북교류를 가로 막는 물리적인 문제를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교류가 가능해진다면 다방면에 걸친 남북교류를 촉진하고 유도할 것으로 기대된다. 남북 교역시에도 정보통신망을 통한 전자상거래를 실시할 경우 불필요한 거래비용을 줄이고 상호 지식사회형 경제구조를 촉진할 수 있다. 아울러 정보통신 교류협력의 기반이 마련되면 통신기기 및 설비산업 분야의 공동투자가 증대되면서 남북협력사업도 활발해질 것이다.
―정보통신 분야에서의 협력사업과 통합을 위해 필요한 조치는.
▲통신분야 협력사업의 특수성을 놓고 볼 때 투자 보장 차원에서 ‘남북한의 통신교류 및 통신산업협력에 관한 규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이 규약에는 사업 범위에 대한 정의를 비롯해 투자 허용 및 우대조치, 투자 보호, 공통기술표준 수립, 남북한 통신인력 교류 및 훈련 등이 포함돼야 한다. 또 남북한 통신교류를 위해서는 남북한이 공통의 기술표준과 설비를 채택해야 됨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남북 공통의 정보통신기술 표준을 위한 추진기구 설립의 필요성은.
▲통신통합을 위해서는 통신망과 같은 하드웨어 기반의 구축뿐만 아니라 인터넷 활용에 필요한 주소체계 정비, 표준화 등 소프트웨어적인 정비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남북통신기술위원회(가칭)’를 구성하고 여기에 남북한 통신 관련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동수로 참여시켜 공통의 기술표준을 채택하도록 하고 통신 분야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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