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륜사가 다시 조선으로 들어선 것은 1886년 4월이었다. 그러나 미륜사의 혼을 빼앗았던 그녀는 남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미 정해진 상대와 예정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미륜사. 그녀의 결혼 사실을 알고 현기증을 느꼈다. 거문고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영청호’에서 내려 몸져 누웠을 때 자신을 보살피던 그 손길이 그리웠다. 하지만 미륜사는 조선 땅을 떠날 수 없었다. 조선의 하늘과 태양과 산이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좋았다. 그 여인이 사는 나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륜사는 앞으로 30년의 세월을 조선 땅에서 살며 아픔을 함께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1915년 2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자신의 고향이 아닌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조선 땅을 다시 밟은 미륜사는 청국 공사관 옆으로 옮긴 ‘한성전보총국’에서 청국 소속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한성전보총국’은 인천과 서울, 평양, 의주를 거쳐 청국과 연접된 서로전선을 관리하던 곳으로, 미륜사는 그곳에서 자신이 가설한 서로전선 운영의 기술분야 책임을 맡았고, 조선의 전신망 확장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한성과 부산을 잇는 새로운 전신선 가설에 대한 일을 처리했다.
서로전선 가설로 인해 조선에 대한 주도권 확보에서 청국에 기선을 제압당한 일본은 불안감을 느꼈다.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진 1876년 1월 부산에 자신들의 우편국을 개설하였고, 1883년 1월 미륜사가 소속해 있던 덴마크의 대북부전신회사의 청원을 받아들여 나가사키와 부산을 잇는 해저 케이블 포설과 함께 전신국을 부산에 개국한 일본이었지만 그 전신선은 가장 중요한 수도 서울과 연결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청국이 먼저 한성과 연접되는 육로전신선을 가설하게 되자 불안을 느끼고 항의를 시작했다.
조선정부와 청국이 ‘의주전선합동(義州電線合同)’이라는 이름의 서로전선 가설에 대한 조약을 체결한 다음날인 1885년 6월 7일, 일본 대리공사는 조선정부의 외무독판을 방문하여 청국과 맺은 조약은 일본과 이미 맺은 조약의 내용에 위배된다며 항의했다. 8월 8일에는 본국정부로부터 어떻게든 전선가설을 막으라는 강력한 훈령을 받고 더욱 강변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인천에서 한성을 거쳐 의주까지 전선을 가설하여 압록강을 넘어 청국의 전신선과 연접하는 것은 ‘앞으로 25년간 본 조약과 대항하여 이익을 다투는 성질의 전선을 가설하지 않으며, 조선에서 관선(官線)을 가설할 경우 그 것이 해저전선이면 반드시 부산의 일본전신국과 통련(通聯)해야 한다’는 조약내용에 위반되는 것이기에 자신들의 동의가 없는 한 청국과의 조약을 폐기하여 전신선의 가설을 중지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이에 조선정부에서는 같은 해 8월 26일 ‘앞으로 25년간 대항쟁리하는 전선을 금한다 함은 해저전선의 가설을 말한 것이지, 육선의 가설을 금한 것은 아니다. 또 대항쟁리하는 전선이란 직접 부산의 해저전선과 대항하는, 예컨대 부산이나 그 근처에 가설되는 해저전선 등을 지칭하는 바이지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인천이나 의주의 전선이 이와 대항쟁리 하는 전선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답변과 함께, 청국과의 조약체결 이전에 일본공사에게 일본과 이미 맺어진 조약과의 저촉여부를 질문하여 상관없다는 확인과정까지 거친 것을 거론하면서 일본의 항변을 일축했다.
일본은 이후에도 계속 항변하여 오다가 급기야는 서로전선의 가설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성과 부산간 전선 가설권을 요구해 왔다. 상식적으로도 서로전선의 가설을 차단시킬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일본과 부산, 한성을 연결하는 전선의 가설권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그 일을 조선으로 다시 들어와 한성전보총국에서 근무하게 된 미륜사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 처리 과정에서 미륜사는 조선정부와 청국의 입장을 철저하게 대변, 일본측을 괴롭게 했다. 더욱이 전선가설이 조선정부의 주도로 가설하게 되자 미륜사는 가설공사의 지휘를 맡아 직접 측량에 나서서 기자재 절약과 함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미륜사는 일본의 기피인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은 미륜사를 하루 ‘26시간’ 동안 일본에 대하여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매우 귀찮은 존재(일본체신협회잡지 명치 43년 11월호)로 여겼다. 그만큼 정보통신 사업에 관한 일본과의 협상과정에서 언제나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부당한 요구에 항거하였다. 이 때문에 미륜사는 1905년 ‘한일통신협정’에 의해 조선정부의 통신권이 일본으로 넘어갔을 때 다른 외국인들이 면직 처리가 되어 퇴직금과 귀국여비를 받은 것과는 달리, 파면으로 처리되어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여 외교적으로 항의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미륜사에 관한 일본의 시각은 지난번 일부 내용을 소개한 김철영의 ‘요람일기’에도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다. ‘요람일기’ 1904년 2월 14일자의 내용이다.
▲체신과장(김철영)이 일본 우편국장과 담판한 사건-【오늘 상오 10시경에 일본 우편국장 다나카지로가 전보원 5인과 위관 1인, 헌병 4인을 대동하고 전보총사에 온다기에 체신과장이 즉시 총사에 가서 날씨에 대한 인사를 한 후 찾아 온 이유를 물었다.
다나카: 갑오년의 일청교전 때에 귀국과 아국이 동맹하여 전선(電線)을 차용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러시아와 개전한지라 우리가 귀 전사에 머무르는 것이 통신이 편리하니 귀국의 관보, 상보는 통신에 장애가 없도록 할 터이나 개성, 평양, 원산 등지의 발착전보는 우리 일본 우편국 직원이 검사하고 도장을 찍은 후에 발송 및 배달케 하고, 암호로 된 사전은 접수나 발신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또한 전보 및 우편사무에 관한 모든 사무는 서로간에 일체비용을 면제케 함이 타당하며, 귀아 양국간 전보를 인편으로 송달하면 지체될 우려가 있으니 내일부터 선로를 부설하고 장치를 설치하여 전등에 불이 들어온 후에 상호 직접 타전하기로 이미 귀원(통신원)의 승낙을 받았다.
김철영: 당신들이 전사에 온다는 것은 이미 본원 총판의 명령을 받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때에 귀아간 통신사무를 편의에 따라 시행하여 서로 방해하지 않음이 타당할 것이고, 이미 말한 비용의 면제와 사전암호의 금지, 접련기계 등의 일은 마땅히 본원 총판에 보고한 후 허락을 얻어 시행여부를 회답할 수 있다.
다나카: 전사 고문 미륜사의 평상시 업무가 어찌 분장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해당 사무는 우리가 대신해도 서로 방해되지 않으니 해당 직원에게 말해서 전사에 나오지 못하게 함이 타당할 것이다.
김철영: 미륜사를 포함한 직원들의 사무분장은 전보사장이 담당케 하였으니 당신은 간섭 말라. 미륜사에게는 이미 자세히 알려 나오지 않고 있으니 그리 알라.
다나카: 개성과 평양의 전화통신은 필요에 따라 끊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이유를 각 직원에게 공포하여 잘 알도록 하기 바란다.
김철영: 이 역시 총판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받아야 한다.
다나카: 이상의 사항은 우리 천황폐하의 칙교다. 귀국 대황제폐하(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내 마음대로가 아니다.】
천황폐하 칙교.
조선 땅에서 자기네 천황을 들먹이며 불법으로 통신시설을 강점하는 일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미륜사는 철저하게 조선정부 편을 들었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라 26시간 동안 일본을 감시하고 경계했다. 일본이 미륜사를 미워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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