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가 고래를 삼켰다.
이동전화 단말기업체인 팬택이 현대큐리텔을 인수키로 하자 온갖 화제가 만발하고 있다. 팬택이 비록 벤처 신화를 창조하고 무섭게 성장하는 중견기업이라지만 자본금도 많고 생산력도 훨씬 큰 현대그룹 자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란 게 주변의 평가다. 더구나 현대큐리텔과 팬택의 지난해 매출을 합하면 1조5000억원에 육박, 당당히 30대 기업에 진입하는 수준이란다. 업계 참새들의 입방아를 피해가기 어렵게 됐다.
주목할 것은 KTB와 공동으로 인수에 나서는 팬택이 회사 차원의 자금이 아닌 창업주 박병엽 부회장 개인 지분을 출자한다는 점이다. 팬택의 주요 주주이면서 전략적 파트너인 모토로라와의 관계를 감안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튼 자연인 박병엽의 선택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국내 언론의 논조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인수전에 뛰어든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만으로도 “CDMA기술 유출을 막았다”는 평가도 있고, “CDMA 전문기업으로서 팬택의 역량을 배가해 세계 시장을 호령할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박 부회장에 대한 기대와 격려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에도 박병엽씨는 뉴스메이커였다. 벤처 붐이 일기 시작했을 때 무선호출기와 이동전화 단말기로 연타석 홈런을 쳤고, 외자 도입이 절실한 IMF시절엔 배짱을 퉁기며 해외 자본을 유치했다. 수출이 부진할 때는 한꺼번에 수억달러 이상의 대량수출계약을 체결, 이슈를 좇는 언론의 갈증을 해소해주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박 부회장은 중앙언론사 정보통신 담당기자들이 수여하는 첫번째 정보통신인상을 받기도 했고, 세간의 유명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정치권에서도 그의 상품가치를 탐내 영입을 권유하기도 했다.
이렇게 부각된 박병엽씨에 대한 이미지에는 그가 타고난 장사꾼이란 점도 있지만 몇 가지 조건이 어우러진 것이다. 우선 그는 본인이 즐겨 표현하듯 ‘달랑 팬티 한 장만 입고’ 출발한 벤처다. ‘거룩한’ 학벌과 인맥으로 제도권에 진입한 것이 아닌 자수성가형 벤처의 표본이란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상품성을 높인 것은 아이디어와 펀딩으로 벼락부자가 된 일부 닷컴과는 달리 제조업이 배경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수출이라는 우리 경제의 지상목표를 앞뒤 안보고 추구한다는 데 후한 점수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박병엽씨는 매우 성공한 기업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박 부회장이 현대큐리텔을 인수하는 순간부터 일반인들이 그를 벤처인으로 대접하기에는 어딘가 껄끄럽게 느낄 것이다. 조금 과장하면 30대 기업 총수 아닌가.
그는 이미 외형이 5000억원을 넘어서는 기업은 벤처적 경영으로는 어렵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겨야 한다며 팬택의 경영에서도 한걸음 물러서 있다. 큐리텔을 인수해도 현재의 경영체제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대기업 총수로 바뀌는 그의 행보에 시선이 쏠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팬택-현대큐리텔호가 출범한다면 팬택으로서도 창사 이래 최대의 분수령이 되겠지만 박 부회장 개인으로서도 인생의 승부수를 던지게 된 셈이다.
흔히 하는 말로 초심을 유지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재벌 흉내내지 말고 ‘팬티 한 장 입고’ 시작한 그 마음으로 가야 한다. 우리도 벤처에서 출발, 30대 기업까지 오르면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기업가 몇 명쯤은 가질 때가 됐다.
<이택 산업전자부장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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