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로 대표되는 정통 체크룩이 가을을 물들이는가 싶더니 어느덧 백화점 쇼윈도에는 더플코트가 오랜만에 등장했다. 체크룩에서 더플코트로 이어지는 올 가을과 겨울 패션의 키워드는 복고다. 그래서 그런지 목도리, 모자와 같은 소품도 손으로 짠듯 올이 굵은 니트류가 부쩍 눈에 띈다.
한여름 ‘친구’로 시작된 문화콘텐츠업계의 복고 바람이 계절이 바뀌어도 꺾일 줄 모른다.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영화, 음악, 방송분야에서 복고적인 주제의 콘텐츠들이 양산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출판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의 영역으로까지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출판·만화업계에서는 고전만화 출간이 붐을 이루고 있다. ‘꺼벙이(길창덕)’ ‘도깨비감투(신문수)’ ‘두심이 표류기(윤승운)’ ‘5학년 5반 삼총사(박수동)’ ‘철인강타우(이정문)’ 등 5종의 명랑만화 고전이 새로 출간됐다. 지난달 선보인 이들 만화가 화제를 모으자 바다출판사는 ‘악동이(이희재)’ ‘로봇찌빠’(신문수)’ ‘요정핑크(김동화)’ ‘달려라 하니(이진주)’ 등 고전 작품을 잇따라 내놓을 예정이다.
‘로보트태권V’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고 ‘우주소년 아톰’ ‘미래소년 코난’ ‘뽀빠이’ 등 70∼80년대 유행했던 애니메이션을 동영상으로 서비스해주는 사이트(http://www.vodcenter.co.kr)도 인기를 끌고 있다.
게임업계도 복고의 열풍이 거세다.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 전자오락실을 찾았던 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제품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먼저 전자오락실용 아케이드 게임기를 제조하는 업체들이 불을 지폈다.
이오리스는 70년대 유행했던 놀이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소재로 한 동명의 아케이드 게임기를 선보였다. 이 회사가 6개월의 개발기간을 통해 최근 선보인 이 제품은 게임 내용뿐 아니라 그래픽·캐릭터 디자인 모두 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오리스는 또 모래밭에서 즐겼던 ‘깃발 쓰러뜨리기’ 게임을 소재로 한 ‘엘도라도’의 개발을 완료하고 겨울시즌에 발표할 예정이다.
멀티미디어컨텐츠(대표 변승환)는 맨주먹으로 즐기는 놀이게임 ‘쌀밥 보리밥’을 응용한 게임을 개발중이며 지엠존(대표 정진문)은 주사위 보드게임인 ‘뱀주사위놀이’를 이달 중순께 선보인다.
최근에는 모바일(무선인터넷) 게임분야에도 복고 바람이 불고 있다. 30대 이상의 연령층이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전자오락실에서 즐겼던 ‘갤러그’ ‘스페이스 인베이더’ ‘문 패트롤’ 등과 같은 게임들이 모바일게임으로 바뀌어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
이같은 복고풍 콘텐츠들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꺼벙이’를 비롯한 고전 출판만화는 업계는 물론 사회적인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7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케이드 게임기 역시 침체돼 있는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오리스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제품출시 2개월 만에 4000대가 판매됐고 연내 5000대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아케이드 게임기 시장에서 베스트 프로덕트 자리를 예약해 놓고 있는 셈이다.
문화콘텐츠 분야에서의 복고 바람은 상업적인 성공 이외에도 수요층의 저변을 확대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복고 문화상품의 대부분은 386세대 이상의 장년층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연령층으로 보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의 세대로 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다. 이들은 대부분 돈을 벌어들이는 경제활동 측면에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측면에서는 소외된 주변인이다. 옛것에 대한 향수라는 감성을 자극하는 출판만화나 게임을 즐기면서 이들 장년층은 자연스럽게 문화콘텐츠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장년층의 수요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게임분야에 이들을 전자오락실과 모바일게임 앞으로 불러모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10대나 20대 초반의 문화로 치부됐던 게임이 영화와 같은 국민적인 문화상품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복고가 단순한 눈요기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문화적 수요를 만들어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장 기반층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완성도 높은 상품개발이 절실하다. 예컨대 옛것을 재현하더라도 창조의 기운이 제품에 살아 움직여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측면에서 80년대 중반 쓰러져가던 월트디즈니를 살려낸 복고전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80년대 초 도산위기를 맞은 월트디즈니는 85년부터 리바이벌 클래식 전략에 따라 이전에 히트한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재개봉하고 비디오로도 출시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 대성공을 거두었다. ‘백설공주’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 ‘라이온킹’ 등 월트디즈니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이 이미 과거에 히트했던 만화를 새롭게 부활시킨 작품이다. 물론 단순히 복고주의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각과 기술, 마케팅을 바탕으로 고전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의 한창완 교수는 “월트디즈니는 회사 전체 입장에서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경쟁체제가 극도로 심각한 상황에서 복고전략을 구사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월트디즈니의 출판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 새롭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면서 국민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월트디즈니와 같은 복고주의가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복고주의 덕분에 중장년층이 문화콘텐츠의 주 소비층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낸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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