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20)이순신장군과 통신용 연

어릴 적 시골 들판에서 언 손 호호불며 날리던 연은 옛날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던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다.

 창호지 여러 번 접어 가위로 오려내 동그랗게 구멍을 내고, 해진 대나무 우산살 깎아 살대를 만든 후, 그 살대 정성스레 밥풀을 발라 창호지에 붙여 만든 연은 날리지 않을 때에도 늘 하늘에 떠오르게 했다. 가운데 꼬리 길게 단 연을 띄워 올리기 위해 넓은 들판 달릴 때 다가드는 바람 시원했고, 얼개에 감긴 연실 추스르던 손끝의 그 느낌 팽팽했다. 정월 대보름날 그동안 날리던 연 하늘로 멀리 날려버리면서 늘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통신 본사건물 1층에는 한국통신 과학관이 있다. 연 10만여명이 방문하고 있는 한국통신 과학관에는 일반인들에게 정보통신의 문화와 정보통신의 기본원리를 설명하고, 초고속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인터넷과 친숙해지는 계기를 마련, 이를 통해 정보통신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정보통신사회에서 각종 정보통신 매체의 활용성을 키워주는 교육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한국통신 과학관 기획전시실에는 ‘한국통신의 발자취’란 이름으로 정보통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 전시물 사이로 각각 무늬가 다른 연들이 다수 걸려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통신용으로 활용했다는 연을 재현해 제작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고 사천에서 거북선을 사용, 왜선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척을 각각 격파하고 한산도에서도 왜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의 큰 무공을 세웠던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사용한 연은 모두 31가지로, 그 문양과 색깔에 따라 통신의 내용이 달랐다. 그때 그때의 전투 상황에 따라 적절한 명령을 이미 정해진 그림의 연을 하늘로 날려 군사들에게 전달하는 통신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평상시에도 왜군의 상황을 알려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통신 신호로 활용했다.

 세계 최초의 연은 BC 400년 경, 그리스 대 학자 플라톤의 벗이었던 ‘알투스’라는 사람이 만든 연이라고 한다. 그 후 동양에서는 BC 200년 경 중국 한나라 때의 장수 한신이 군사적 목적으로 연을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전해진다. 당시 한신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연에 사람을 태워 적의 성을 정찰하게 하였으며, 항우가 이끄는 초군과 싸울 때에는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연 아래 바구니를 달아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을 태운 다음, 그로 하여금 구슬픈 망향곡을 부르게 함으로써 적병들의 마음을 동요시켜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의 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열전’에 나타난다. 신라시대의 김유신 장군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연을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바로 그 것이다.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한 정미년(647·선덕여왕 16년)에 일부 신하가 여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수 없다는 구실로 내란을 일으켜 여왕을 폐위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여왕이 이끄는 군사들은 월성에서, 반란군은 명활성에서 대립, 10여일 동안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하늘에서 큰 별똥이 떨어지자 왕군이 패망할 징조라 하여 왕군은 물론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왕군의 지휘관이었던 김유신 장군은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허수아비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큰 연에 매단 후에 불을 질러 하늘로 올려 보냈다.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유신 장군은 이를 통해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어 병사의 사기를 돋운 다음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는 내용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연날리기는 아이들의 놀이로 세시풍속화 되었으며, 그 기록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잡지(京都雜志)’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다.

 연의 종류는 100여종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많지만, 그 중에 한국 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연은 직사각형 중앙에 방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활용하던 형태의 방패연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근거지였던 부산으로 쳐들어가 왜선 100여척을 부숴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격파한 후,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이 전략상 사용한 통신용 연은 무늬와 색상에 따라 각기 고유 명칭과 통신법칙이 있었다. 삼봉산 모양을 딴 삼봉산연은 흩어져있는 모든 전선들과 병사들은 삼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는 뜻이며, 돌쪽 바지기연은 창고의 문고리 문양을 사용하여 병참이나 병기의 보급을 알렸으며, 수리당가리연은 적의 상황을 정찰하라는 내용의 통신신호다.

 반장연은 소형선의 지휘관을 소집할 때, 중모리연은 사방으로 적을 완전 포위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때 사용되었으며, 기바리연은 맞붙어 싸우라는 명령을 뜻하며 머리연은 주·야간에 산능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의 통신 신호이고 윗 깔치 당가리연은 오전에, 아래 깔치 당가리연은 오후에 전투를 개시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봉산의 모양을 딴 이봉산연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 한 후 사용되었던 것으로, 이봉산으로 군사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날렸다고 한다.

 전투를 위한 통신용 연과는 별도로 일기예보를 알리는 데에 사용된 연도 있다. 태풍이 밀려올 것이니 소형 병선들의 줄을 길게 매도록 하라는 내용의 긴고리연과 역시 태풍에 대비, 소형 병선들의 줄을 짧게 매어두도록 할 때 날렸다는 짜린고리연 그리고 우천을 알리는 용연 등이 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통신용 연의 색상은 우리 민족의 오행사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기본색으로 빨강, 노랑, 파랑 등 세가지의 유채색과 흑색, 백색 등의 무채색을 활용하였다. 즉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오는 오방위를 상징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활용한 연의 원형을 재현시킨 것은 15년 동안 충무와 사천 지역을 돌아다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자료를 수집한 한 인간의 집요한 노력에 의해서였다. 이한욱씨(당시 사천군 거주). 현재 근황은 알 수 없지만 몇 년 전 필자와 만난 그는 이순신 장군의 통신용 연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었다.

 당시 이한욱씨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활용한 연의 문양이 지닌 의미는 극비사항으로,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재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현재 한국통신 과학관에 전시되고 있는 연도 이한욱씨 작품이며, 해군사관학교와 진해문화원 그리고 독립기념관 등에도 전시되어 있다.

 연날리기는 지금도 행해지는 민속놀이로, 이순신 장군이 활용한 통신용 연과는 달리 오락성과 민속 신앙적 의미도 지닌다. 민속 신앙적 의미로 ‘액막이 연날리기’가 있는데, 옛날부터 정월 대보름날이 연에 ‘액(厄)’자 또는 ‘송액(送厄)’이라 써서 높이 날려보냄으로써 액을 쫓아보낸다는 풍습으로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통신용으로 활용한 연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모든 액을 하나의 연에 실어 하늘 높이 날리고 그 연실을 툭,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고은미부장 emk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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