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를 보면 우리의 국산화정책이 얼마나 근시안적인가를 알 수 있다. 지난 90년대 중반 정부와 소자업체들은 반도체의 도약을 위해 수입에 의존해온 반도체 장비의 국산화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미래산업, 주성엔지니어링, 케이씨텍, 한국DNS, 성원에드워드, 아토 등 10여개의 굵직한 장비업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았다.
장비시장이 나아졌나 하면 그렇지 못하다. 반도체 장비 국내 공급비율은 96년 15.2%, 97년 16.5%, 98년 21.1%, 99년 12.5%, 2000년 11.7% 등으로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일부 장비업체들은 주식상장으로 돈을 버는 경영자만 생겨났지 실제로 세계적인 경쟁력 있는 장비업체는 없는 실정이다. 여전히 핵심장비는 외국 업체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도체 장비는 지난해 수출 3억3000만달러, 수입 36억1000만달러로 32억8000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일으키고 있다.
이는 맹목적인 장비 국산화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장비를 국산화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어떤 장비를 국산화하고 세계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략을 구사할 것인지가 성공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87년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는 수십 장의 웨이퍼를 한꺼번에 처리해야만 했던 공정을 개선, 여러 개의 체임버를 이용해 웨이퍼를 한 장씩 가공하고 처리하고 로봇이 자동으로 웨이퍼를 이송하는 ‘프레시전5000’을 개발했다. 이 장비는 업계에 패러다임 시프트의 사례로 인식돼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정보시대관에 영구전시돼 있고 오늘날 모든 업체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발상의 전환을 근거로 한 상품개발 노력은 국내 장비업체들이 만년 후발업체의 꼬리표를 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300㎜ 웨이퍼용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는 외국 선진장비업체들과 경쟁해 볼만하다는 게 차세대 장비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국내 장비업체들의 공통된 견해다.
더욱이 올해안에 열릴 것으로 보이던 300㎜ 장비시장이 전세계적인 반도체 불황으로 소자업체들이 장비도입을 연기하면서 국내 장비업체들은 그만큼 개발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됐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이 모든 게 희망사항일 뿐이다.
국내 업체들이 경쟁해야 하는 외국 장비업체들은 이미 90년대 초부터 300㎜ 장비개발에 준비해왔다. 역사가 일천한 국내 장비업체들이 이들 업체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매년 연간 매출액의 12∼16%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는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가 지난해 R&D에 쏟아부은 금액은 11억달러. 지난해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들 전체가 국내에서 벌어들인 금액 4억7000만달러보다 2.3배 이상 많은 금액이다. 상황이 이러니 국내 업체들이 해외 선도업체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 상황이라면 200㎜에서는 뒤졌지만 300㎜에서 추월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그야말로 계획으로만 끝날 공산이 크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90년대 중반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던 장비업체들의 경영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들 업체의 대부분은 미래를 대비하는 안목으로 차세대 기술개발에 과감한 투자를 하기보다는 단순히 생산시설만을 확대하거나 돈이 될 듯 보였던 IT사업으로 한눈을 팔았던 게 사실이다. 오히려 무모한 재테크보다 동종업체간 연대 또는 인수합병(M&A), 특화된 제품개발에 관심을 집중했더라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반도체 불황의 언덕 정도는 가뿐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물론 지금 전개되고 있는 업체간의 소모성 과열경쟁도 방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지금의 브랜드 이미지로는 해외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시너지 효과를 전제로 한 기업합병은 적극 추진돼야 한다.
또 해외시장 공략의 필수조건으로 국내 소자업체의 라인을 빌어 신장비 베타테스트를 실시한 후 장비 몇 대를 상징적으로 공급해야만 하는 절차상의 관행도 개선돼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의 장비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장비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한 수십 개의 소자업체들이 장비개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장비업체들은 이에 걸맞은 R&D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안되는 국내 소자업체들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장비업체들을 위해 기술개발 인력을 지원하거나 FAB의 일부 공간을 내어주는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이 10여년 전 장비개발과 신뢰성평가를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세마텍(SEMATEC)을 설립해 장비산업에서 앞서 있던 일본을 추월한 점이나 이에 자극받은 일본이 90년대 중반 셀리트(SELETE)를 설립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평가센터 설립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반도체 장비의 성능 및 안정성을 평가하는 권위있고 공신력있는 반도체장비 신뢰성평가센터가 마련돼야 한다. 물론 적지 않은 자금이 투입돼야 하는 만큼 정부와 소자업체의 관심이 필수적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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