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디스플레이산업계와 증권가는 한 경영자의 갑작스러운 퇴진에 깜짝 놀랐다. 한국전기초자의 서두칠 사장이다. 회생 불능의 회사를 흑자 회사로 탈바꿈시킨 성공적인 경영자였기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이유는 경영권을 둘러싼 아사히글라스와 서 사장의 갈등이었다. 아사히는 불황을 맞아 한국전기초자에 대한 투자 확대 약속을 보류했고 아예 감산까지 요구했다. 서 사장은 경쟁력을 갖춰 생산량을 늘려야 하며 특히 불황기일수록 더욱 투자해야 한다고 맞섰다가 결국 물러났다.
서 사장의 사임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선진기업들에 있어 한국은 여전히 생산기지에 불과하다. 지금은 그 가치마저 떨어졌다.
아사히만 해도 한국에 세우려던 TFT LCD용 유리 생산라인을 대만에 두기로 했다. 앰코테크놀로지, 칩팩, ASE 등 한국에 진출한 반도체 패키징 업체들도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기려 한다. 외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한국 공장에 대한 투자 확대 계획을 백지화하고 여차하면 대만이나 중국에 갈 태세다.
LG필립스디스플레이, 삼성SDI와 같은 국내 업체들도 생산 라인의 중국 이전을 확대하고 있다. 모두들 한국을 떠나려 한다. D램 반도체와 브라운관, TFT LCD 최대 생산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 최고의 공정기술과 제조 경쟁력이라는 공든탑이 기울고 있다.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기업들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방법과 단순한 생산기지를 뛰어넘어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는 방법이다.
전문가들은 두 방안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기적으로는 전자를, 장기적으론 후자의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쟁력이 제조에서 나오고 있는 만큼 국내 업체뿐만 아니라 외국 업체도 생산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각종 세제나 공장 인허가 등 행정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
한 예로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공장을 확장하려 해도 공장총량제의 규제에 묶여 쉽지 않다. 장비 업계의 한 관계자는 “누구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만큼 정책적인 지원을 받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대만과 중국이 D램과 디스플레이 산업의 주력 생산기지가 될 것이다. 이에 대응해 국내 산업 구조를 제조에서 연구개발(R&D) 중심으로 점차 전환해야 한다.
대만과 중국과의 분업체제를 통해 우리는 부가가치 높은 첨단 기술 및 제품을 계속 가져가는 쪽으로 산업 구조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산학연의 연구개발에 대한 정부 지원을 강화해야 하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지난주 한국디스프레이연구조합이 오는 9월 끝나는 G7 후속 과제로 차세대 디스플레이 연구개발 과제를 정부에 신청했으나 탈락했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탈락이다.
한 TFT LCD 업체 임원은 “대만이 맹렬하게 추격하는 요즘 연구개발을 비롯한 정책적인 지원이 가장 절실한데 ‘돈많은 LCD회사들이 뭘 지원받을 게 있느냐’고 면박당하기 일쑤다”고 하소연했다.
D램 수출이 부진하자 시스템IC인 비메모리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묵은 얘기를 반복해서 틀고 있다. 정부정책이 단기실적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와 달리 비메모리반도체는 단기간내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산업육성프로그램을 짜서 이끌어가는 시스템이 부재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정책을 정해 펼쳐나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좋은 산업 육성책은 돈이 몰리게 하는 것이다. 결국 거품으로 판정났지만 IT벤처 붐은 이러한 진리를 보여줬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 정책도 이러한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최근 반도체 설계나 디스플레이 관련 부품, 소재 분야에 벤처 창업이 잇따르고 있다. 이
들 기업은 직접 생산하기보다는 기술 전문회사를 표방하고 있다.
정부 정책은 바로 벤처자본이 자연스레 이들 기업에 몰리도록 물꼬만 터주면 된다.
항상 지적되고 있지만 대기업의 문제다. 우리 대기업은 세계수준에서 볼 때 여전히 경쟁력면에서 뒤처지고 있다. 대기업 규제 일변도로 가기보다는 오히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존할 수 있는 틀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휴대폰 산업의 성장이 관련 부품 산업의 발전을 낳았듯 시스템업체와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체는 함께 가야 한다.
삼성전자의 경우 D램을 이을 차세대 제품 선정에 고심하고 있다. LG필립스디스플레이, 삼성SDI 등도 PDP, 유기EL, FE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에 대한 전략을 마련중이다.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기 전략이 시스템 사업과 긴밀히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LG전자는 디지털TV용 칩 사업을 강화하면서 파트너로 하이닉스 대신 대만의 TSMC를 잡았다. LG전자의 한 실무자는 “칩 공급의 유연성이나 서비스면에서 TSMC가 우수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도체 업체와 시스템 업체간의 협력이 미흡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이다.
이래서 국내 업체들도 긴축경영이나 구조조정에 앞서 어떤 강점을 갖고 있는지 도대체 약점은 뭔지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는 주장은 날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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