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을 넘겠다고 난리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최대 시장 중국을 공략하려는 IT업계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중국의 고위 관료나 기업체 CEO가 방한이라도 할라치면 우리 정부는 물론 업체들까지 말그대로 칙사 대접에 나선다. ‘콴시(관계)’가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중국인 특유의 정서를 감안해 얼굴도장, 눈도장 찍기부터 시작한다.
특히 수출로 먹고 살아야 하는 한국 IT업계는 중국 시장이야 말로 놓칠 수 없는 보고(寶庫)다. 어지간한 기업이라면 예외없이 중국 전담부서를 갖추고 현지 정보 파악에서부터 협력 프로젝트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 붐을 너머 중국 광풍이다. 물론 이런 사정은 한국뿐 아니다. 미국·일본·유럽의 IT대국이나 거대기업들은 모조리 황색 돌풍에 휩싸여 있다.
중국 시장은 매력적이다. IT경기 후퇴를 신호탄으로 세계 경제가 서서히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지금 10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만이 유일하게 연평균 7%가 넘는 고속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 IT산업과 경기 전반의 유일한 돌파구로 중국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IT업계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중국은 우리의 최대 시장이지만 동시에 최강의 라이벌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 IT산업을 뿌리째 뒤흔들 강력한 경쟁자들이 칼을 갈고 있는 곳이다.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기업 나름의 기준이 있겠지만 지금처럼 시장성에만 포커스를 맞춘 들 뜬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큰 코 다칠 수도 있다. 그간의 한국 IT산업 경쟁국은 대만·싱가포르·홍콩·말레이시아 등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당연히 중국이다.
게다가 경쟁국은 모두 소위 중화문화권이다. 이들의 시장이 큰 것처럼 이들이 연계하면 한국 IT산업을 위협하는 엄청난 세력이 된다. 지금과 같은 기술 퍼주기식 중국 진출은 2∼3년내에 한국 IT산업의 목을 죄는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확률이 매우 높다.
중국의 실력을 한번 보자. 중국은 한국은 물론 이미 일본까지 추월한 세계 최대 가전생산국이다. TV는 세계 시장의 36%를 점유하고 있고 에어컨은 무려 절반(50%)을 차지하고 있다. 세탁기는 24%다. 모두 세계 랭킹 1위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저임금에 의한 싸구려 제품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면 오산이다. 중국은 중저가 시장에서도 강세를 보이지만 고급형 부문에서도 만만치 않은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이 수입한 에어컨 가운데 50%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IT의 대명사인 PC의 경우 한국에서의 상식으로 중국산 PC는 보잘 것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정은 정반대다. 지난해 중국에서 팔린 PC의 브랜드 조사 결과 외국 브랜드 제품은 59만대, 불과 22% 정도였다. 중국산 브랜드가 141만여대, 55%로 가장 많고 중국산 조립PC도 59만대, 23%의 점유율을 나타냈다.
게다가 중국의 일부업체는 기술력과 브랜드면에서 이미 세계 정상급으로 올라 섰다. 최대 PC메이커 롄샹그룹은 세계 100대 첨단 정보통신기업 평가에서 8위를 차지했다.(200년 6월 비즈니스위크)
한국이 IT분야에서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이동전화단말기도 안심할 때가 아니다. 지난해 11월부터 생산라인을 가동한 캉지아는 심청과 실리콘밸리에 통신개발센터를 설립하고 100여명의 전문인재를 끌어 모았다. 제품은 물론 자체개발이다. 이 회사가 선보인 정이통 3118 모델은 국제 품질인증을 받았다.
모토로라와 합작생산 경험이 있는 뚱신은 자체 모델을 출시, 연내에만 200만대 이상의 판매를 낙관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05년까지 생산규모를 연 1000만대 이상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연산 1000만대 규모는 한국에서의 삼성전자와 LG전자 정도다. 연간 300만대를 생산하고 있는 커젠과 쭝싱 역시 자사의 지적재산권을 앞세워 이 시장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이들은 핵심기술인 주파수 전송설계에도 자신감을 보인다고 한다.
심지어 지난달에는 중국의 이동전화단말기 생산업체 17개사가 사상 최대 규모의 제휴계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광고, 원자재 구매, 핵심기술 개발에 협력해 외국계 업체가 장악하고 있는 중국시장 판도를 바꾸어 놓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중국 단말기 시장에서 국산 비율은 10% 안팎에 불과하지만 2005년 이후에는 50% 이상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고의 첨단기술 집약체인 스위칭(교환)부문에서도 중국은 자력갱생을 추구하고 있다. 이 시장은 2∼3개의 다국적기업이 독점해 왔지만 중국제품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상하이전신은 앞으로 구축하는 광대역 통신망에 자국업체인 스다네트워크의 호스팅 교환기를 도입키로 한 바 있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중국이 몰려온다’라는 보고서는 중국의 오늘과 내일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결정판이다. 보고서는 중국의 성장이 전통산업 위주였으나 개혁개방 이후 IT 등 첨단분야가 급속도로 부상하고 있고 일부 제조업은 ‘세계의 공장’으로 떠올랐다고 밝혔다.
특히 충격을 주는 내용은 10년내에 중국이 대부분의 주력산업에서 한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견이다. 이미 백색가전은 한국을 넘어섰고(한국 5위, 중국 1위), 디지털가전 및 첨단 공작기계는 5년내 대등한 수준에 올라설 것으로 예측됐다.
10년내에 한국과 대등해지는 부문은 정보통신과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0년후에도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질 분야는 반도체가 유일할 것으로 내다봤다. 연구소는 중국의 부상이유로 △공산당이라는 강력한 리더십에 기반을 둔 정부의 일관된 IT육성 전략 △상하이 푸둥, 베이징 중관춘, 선전으로 이어지는 첨단산업 발전 3개 축의 급성장 △미국 뺨치는 선진 경영기법 및 자본주의 성격 도입 등을 꼽았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와 기술 향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이동전화 단말기조차 외국계 기업의 완제품 수입은 불허한다. 교환시스템 등 첨단기술 제품일수록 현지기업과의 합작생산만을 허용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술이전이다.
이 때문에 최대 시장 중국에 발을 들여 놓기 위해서는 현지 합작법인을 세울 수밖에 없고 원천·핵심기술을 제외한 주변기술과 생산기술은 중국에 이전해야 한다. 어차피 한국 IT업체도 핵심기술은 외국에 의존한 채 생산기술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중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예컨대 국내 통신업계가 걱정하고 있는 중국의 실력 향상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통신산업은 한국·미국·일본의 기술을 받아들여 벌써 3세대 시스템의 독자개발을 공언할 정도로 막강하다.
그래서 중국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금도 기술 퍼주기식 중국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기업이 있다면 주판알을 다시 튀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고양이 새끼가 아닌 호랑이 새끼가 됐다. 중국은 한국 IT산업계가 언젠가는 정면승부해야 할 라이벌이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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