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달 초 있었던 루슨트테크놀로지스의 해외매각 발표는 미 국민들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준 것 같다. 일부에서는 80년대 후반 콜럼비아 영화사가 일본 소니에 매각될 때 못지 않게 놀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루슨트는 AT&T에서 독립한 미국의 대표적인 통신장비 업체. 이 회사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경제의 불황이 시작되면서 매출이 격감하고 대규모 적자를 내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 올들어 대규모 감원 등 구조조정을 시행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루슨트가 이같은 지경에 처하게 된 데는 시장상황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회사 바깥에서는 경영자의 부재를 중요 요인으로 꼽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헨리 샥트 부사장을 임시 최고경영자(CEO)에 임명해 간신히 회사를 꾸려왔다. 그러나 임명 초부터 그는 재무와 회계 등에 밝은 전형적인 관리인일 뿐 한 기업의 사령탑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우려는 곧바로 현실로 드러났다.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문제들이 불거지자 이를 조정할 만한 위치에 있는 샥트가 CEO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년여
만에 130년 역사를 갖는 루슨트가 침몰지경에 이르렀다.
루슨트의 예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CEO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 준다. 과거 브리티시텔레콤(BT)이 그랬고 애플컴퓨터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CEO가 제 역할을 한 기업은 성장했고 그렇지 않으면 쇠했다.
국내에서도 CEO가 중시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전문경영인마저 제대로 육성되지 않는 우리 기업 풍토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능력있는 CEO가 튀어나오기란 불가능하다.
최근 김대중 대통령은 “유능한 CEO를 발굴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CEO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과 동일시되는 시대에 꼭 들어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유능한 CEO가 발국·지원한다는 막연한 구호로 육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불투명, 비합리적, 무책임을 요구하는 구시대적인 기업 경영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장치 등 외적 정비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CEO의 신분안정이 담보돼야 하며 내적으로는 CEO들의 뼈를 깎는 자성도 있어야 한다.
루슨트의 예처럼 국내에서도 심심찮게 CEO의 자질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몸값도 싸고 재직연수도 평균 3년이 안될 만큼 신분이 불안정한 현실을 개선하지 않고 유능한 CEO를 기대하는 것은 한낱 욕심이 아닐까.
<국제부·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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