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나가보면 한국과 한국인을 상징하는 용어 중 대표적인 게 ‘빨리빨리’다. 중국인을 상징하는 말이 만만디라면 한국인은 빨리빨리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외국 관광지 주변을 걷다보면 현지상인들이나 호객꾼, 관광도우미들이 흔하게 외치는 용어가 빨리빨리다. 이들 외국인의 눈에 비치는 빨리빨리는 부정적인 면이 가득한 듯하다.
사실 빨리빨리는 한국인의 행태를 빗댄 표현이다. 한가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유명관광지를 찾은 이가 허겁지겁 움직이는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일리 만무하다. 특히 외국에서 보여주는 한국인의 빨리빨리는 상당수가 에티켓 차원에서 소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문란하며 매너없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 등등.
오피니언 리더인 외국 기자들은 한국인의 빨리빨리를 곧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와 연결짓는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70년대 이후 고속성장에 대해 한때 빨리빨리 문화가 한국인의 근면성실 바탕 위에서 이뤄낸 성과라고 평가하기도 했던 외국 언론이었다.
이들은 90년대 들어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의 참사에 이어 IMF로 이어지는 한국의 위기를 분석하며 빨리빨리가 결국 문제였다는 비판을 들이대곤 한다.
산업화시대 초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낸 동인이었던 한국인의 빨리빨리가 결국 산업화의 정점에서는 역으로 온갖 부실만 양산하는 원인으로 지적된 것이다.
산업화시대에서 ‘명’과 ‘암’이 교차했던 빨리빨리는 정보화시대인 최근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외국인들에게 부정적인 면이 강하게 비춰졌던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가 인터넷으로 대별되는 정보화 및 뉴미디어 시대 들어 찰떡궁합을 이루게 됐다. 속도가 요체요 생명인 인터넷이 우연치 않게도 빨리빨리를 외치는 우리 한국인에겐 더할 수 없는 파트너로 다가온 것이다.
IMF 직후 데이터통신서비스를 제공했던 98년초 한국통신은 114Kbps를 제공하는 ISDN서비스를 대표적 상품으로 선정하고 그 보급에 마케팅을 집중했다. 그러나 최대 8Mbps를 제공한다는 ADSL기술이 상용화되자 한국통신은 정부와 인터넷 이용자의 속도요구 앞에 무릎을 꿇고 ISDN을 접어야만 했다.
한국통신 내에서도 리스크 부담 및 투자수익률 차원에서 ADSL 상용화가 무리라는 지적이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용자의 막구가내식 속도요구 앞에서는 합리성에 기초한 반박은 의미가 없었다.
98년 7월 두루넷, 99년 4월 하나로통신의 상용서비스로 이어졌던 ADSL, 케이블모뎀 등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인구는 세계 최대다.
최근 500만 가입자를 돌파한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수치 이상이다.
우리나라의 가구수가 1600만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3가구당 1가구 꼴로 초고속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계산이 되며 한가구당 3명이라는 전제를 달면 1500만명 이상이 초고속인터넷 환경에 상주하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인터넷 이용인구는 2100만명 정도며 가구당 PC보급률은 50%에 육박하고 있다. 우리에게 빨리빨리라는 욕구가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엿볼 수 있는 일례며 한국인의 빨리빨리와 인터넷이 얼마나 잘 어울리고 있는지를 상징하는 사례다.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인터넷 무장을 독려했으며 이는 결국 지식정보사회에서 한국 및 한국인의 경쟁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초고속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을 설명하는 데 있어 체질화된 빨리빨리 외에 또 다른 요인도 있다. 옆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라면 나도 놓칠 수 없다는 소비성향, 자식교육을 위해서라면 소도 팔고 논도 팔고, 그래도 안되면 머슴노릇이라도 한다는 식의 교육열기가 그것이다.
한국의 부정적 사회상을 언급할 때마다 제시되는 비판이 인터넷을 필두로 한 정보화 진전에서는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PC도 그렇고 ADSL도 그랬지만 모든 뉴미디어가 도입되는 초기에는 마니아가 주수요층을 이룬다. 그러나 뉴미디어가 대중화되는 단계에서는 부정적 생활모습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게 한국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대중화한 29인치 이상 광폭TV의 급속한 보급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90년대 초반보다 넓은 평수를 제공하는 신도시 이주열풍 속에서 TV 등 가전제품은 당시 불어닥친 대형화추세에 따라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당시 TV산업은 80년 컬러TV 등장 이후 사양산업 우려마저 제기된 상황이었다. TV업체 관계자들은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당시 보다 넓은 평수로 이사가게 된 가정주부들은 먼저 이주한 옆집을 방문하면서 새롭게 대형가전제품에 대한 구매심리가 발동했고 이것이 대형TV 등의 급속한 보급의 계기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옆집이 그러하다면 우리도 구입하겠다는 소위 기죽기 싫은 심리가 당시 그대로 먹혀든 것이었다. 한국인을 설명하는 말 중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참는다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할 수 있다.
상층 동경문화, 아니 옆집 동경문화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이같은 심리는 98년 이후 재현된다. 이동전화의 보급이 그것이다.
96년 PCS 3사 허가 이후 경쟁체제를 맞이한 사업자의 마케팅 강화가 직접적 이유가 됐지만 이동전화 보급은 한국인의 묘한 소비심리와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게 돼 98년말 1300만 가입자가 1년 남짓한 기간에 2700만명을 돌파했다.
소비자층은 비즈니스 유저에서 경제력 및 필수 활용도에서 뒤처지는 10대 학생층으로 번졌고 최근에는 집안에 있는 가정주부에게도 휴대폰은 필수제품이다.
필요를 불문하고 나도 가질 수 있다는 한국인의 소비심리는 PC와 초고속인터넷의 보급에 있어서는 또다른 한가지와 어울려야 한다. 자녀교육에 대한 설명불가능한 한국 부모들의 열기가 그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부모들의 자식교육 열성은 대단하다. 지식정보사회의 최대자산이라는 컴퓨터 및 인터넷 활용교육에서도 한국 부모의 열성은 대단했다.
286에서 386, 486으로, 다시 펜티엄으로, 데스크톱PC에서 노트북으로 이어진 PC산업 활황의 밑바탕에는 학생층 등의 구매열기와 엄마들의 교육열이 어우러진 것이다.
초고속인터넷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요구에 가정주부들이 초고속인터넷을 상징하는 화살을 쏘는 모통신업체의 얼마전 초고속인터넷 광고는 학생들의 요구와 엄마들의 ‘교육이라면’이라는 정서를 그대로 공략한 것이다.
단순히 자식교육 때문에 구입했던 고성능PC와 초고속인터넷은 이제 한국의 가정을 e홈 환경으로 이끌고 있다. 자녀들의 PC활용도를 지켜볼 필요도 있었고 여가활용 차원에서도 주부들은 인터넷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에 생활주변에까지 파급된 주식 열기도 작용했으며 정부의 1000만 주부 인터넷교육도 한몫했다. 한국의 주부들은 이제 컴맹이 아니며 정보화 소외계층이 아니다.
학생과 주부가 정보화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소비 주체이자 경제 주체인 학생과 주부가 인터넷이란 바다를 서핑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자상거래도 주부들이 소비자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면 사실 그 파급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 주체를 제외한 인터넷쇼핑, 인터넷금융 등은 성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정주부들의 정보화대열 합류는 앞으로 가정의 e홈화에 가속도를 붙일
가능성이 높다.
편리성을 맛본 가정주부들. 이들에 한국인의 정서일 수도 있는 빨리빨리와 옆집 동경문화 등이 가세한다면 e홈의 하드웨어적 구축 및 소프트웨어적 구현은 가일층 빨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막가파식 소비성향, 부모들의 자식교육열기 등 한국인을 설명하는 속성들이 이제는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소중한 자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인을 비웃을 때 사용했던 이같은 표현들은 이제 한국 국가경쟁력의 초석이 되고 있다.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근성이 인터넷과 찰떡 궁합을 맞춰 세계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할 때 세계는 한국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e홈 환경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갖춘 국내 IT벤처기업들은 최근 세계화를 향한 발걸음에 주저함이 없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애니메이션과 게임분야는 일본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에서만큼은 일본은 한국 기업과 견줄 수 없다. 한국이 세계일류다.
고속인터넷 환경이 구축된 PC방과 500만 가입자에 다다른 초고속인터넷 환경,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e홈 환경을 갖춘 한국에서 단련된 한국 업체의 온라인 게임은 단연 일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빨리빨리 등 한국의 부정적 모습을 바탕으로 구현된 e홈이 지식정보사회에서 한국을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자 국가경쟁력의 동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만약 외신에서 ‘한국, 제2의 진주만공습’또는 ‘또다른 징기스칸(한국), 유럽을 휩쓸다’는 기사가 타전된다면 그 진단의 중심에는 빨리빨리 등을 바탕으로 구축된 e홈이 있을 것이다.
<조시룡기자 srch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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