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창 부국장대우 과학기술부장 wcyoon@etnews.co.kr
요즘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또 떠나려 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사람은 정직과 능력보다 정실과 지연(地緣)이 우선하는 사회에 정떨어져 떠나고, 또 명예퇴직 등 조기 퇴직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재고용 희망이 없기 때문에 떠난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저마다 이 생각 저 궁리 다하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최근 정보통신 분야 등 고급기술 인력들의 해외 취업이 늘고 있다. 지난 99년부터 취업이민자가 연고나 투자 이민자를 훨씬 앞서고 있는데 이것도 고급두뇌 유출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첨단기술 고급 두뇌의 해외 취업이 갈수록 늘면서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고급 두뇌의 외국행은 출연연은 물론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민간연구소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가경쟁력의 핵심이랄 수 있는 첨단정보기술 분야의 핵심인력 상당수가 외국으로 떠나 일부 연구기관은
현상 유지도 힘들 지경이라고 한다.
과학기술의 중심지인 대덕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지난 한해동안 외국으로 나간 기술인력은 모두 19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 99년과 98년에 외국으로 떠난 인원이 각 6명, 97년 3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해가 갈수록 늘어난 것이다.
최근 ETRI 제3대 원장으로 내정된 오길록 신임 원장은 인터뷰 첫마디에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과 핵심 연구인력의 유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장 내정자가 최대 현안을 인력 유출 최소화로 꼽은 것은 그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대변해 준다.
고급 과학기술 인력이 해외로 떠나는 이유는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도 관련이 있지만 무엇보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근본적으로 열악한 연구 환경 때문이다. 이 가운데 열악한 연구환경은 쉽게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연구인력의 연봉은 외국의 기업이나 연구기관에 비해 턱없이 적다. 최근에는 연구프로젝트 예산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선진국에 비해 인구 1만명당 연구원 수가 훨씬 적은데도 연구원 한 사람에게 지불하는 연구개발비는 선진국의 50% 미만 수준이다. 특히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인력은 98년부터 시작된 3년 단위 계약제 때문에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책연구기관 인력 40명중 39명이 떠나고 싶다는 응답을 한 설문조사는 우리의 과학기술 연구 환경의 현실을 느끼게 한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인력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기술인력의 해외 유출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고급 두뇌들이 빠져 나갔을 때 기업이나 산업현장의 기술개발에 과연 이상이 없을 것이냐는 점이다. 특히 가뜩이나 취약한 국내의 연구 기반이 무너지고 외국과의 과학기술 경쟁에서 더욱 밀리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국가 차원에서 대책이 필요하다.
고급 두뇌들이 찾아가는 선진국은 어떠한가. 선진국과 중국 등에서는 자국의 고급인력 양성뿐 아니라 고급 두뇌의 유치와 확보가 국가경쟁력을 유지하는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 최근 두뇌유치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전문직 취업비자의 할당량을 지난해 11만5000명에서 올해 19만5000명으로 늘렸고 독일도 기술인력에 대해 특별노동비자를 발급하기로 했다. 중국은 해외 유학 인력의 유치를 위해 대도시 거주권과 주택 혜택을 주기로 했고 지난해에는 미국에서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고 한다. 경쟁국인 대만이 IT산업을 중심으로 강력한 경쟁력을 보유하게 된 것도 해외유학과 다국적기업의 근무 경력을 가진 수많은 자국민들의 국내 회귀와 이들의 창업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고급인력 유치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해외 유출 대책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영국은 지난해 연간 600만달러 규모의 두뇌 유출 방지 기금을 신설, 스타급 과학자 50명을 집중 지원하고 있으며 캐나다도 두뇌 유출 방지 기금 등을 신설했다.
우리가 고급인력의 유출을 줄이고 해외 고급인력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과 경기침체 등 현안을 먼저 해결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정부차원의 정책적 대안이 요구된다. 특히 장기적 관점에서 첨단기술 연구인력이 안정적으로 연구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 투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 이와 함께 과학기술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연구기관별 장기 비전 제시도 필요하다. 열악한 연구환경을 개선하지 않고는 G7국가 수준의 기술발전을 논할 수는 없다.
『그간의 연구원 생활을 바탕으로 앞으로 연구원들을 껴안아 주면서도 교육훈련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공부하면서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겠다』는 오길록 신임 ETRI원장의 말도 기술인력 해외 유출 방지대책의 하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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