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석의 실리콘밸리 紀行>(2)실리콘밸리 VC의 돈가방 색깔이 변했다

실리콘밸리 동남쪽에 위치한 새너제이에서 82번 도로(도로명 엘 카미노 리얼)를 따라 북서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스탠퍼드 대학에 이르게 된다. 스탠퍼드 바로 아래쪽 지역이 팰러앨토로 실리콘밸리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벤처캐피털리스트(VC)들이 포진해 있는 자금과 금융의 중심지다.

지난해만해도 실리콘밸리의 자금줄은 매우 튼실했었다. 지난해 3·4분기까지 분기당 투자액이 60억∼70억달러에 달했으며 투자기업 수도 매분기마다 400개사 내외였다. 작년 3·4분기만 하더라도 미국 전역 벤처기업 투자액의 39.4%가 실리콘밸리에 투입될 정도였다. 물론 경기위축이 시작된 4·4분기부터 투자가 급냉, 투자액이 무려 30% 정도나 줄었다. 지난 99년 4·4분기 59.4%로 절정을 기록했던 VC투자 회수율이 지난해 2·4분기 닷컴의 몰락 등으로 3.9%로 추락하면서 투자시장에 썰렁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같은 급냉 분위기는 올 들어서도 그대로 지속돼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상태다.

실리콘밸리에는 큰손이 많다. 큰손 중에는 엔절도 있지만 대다수가 VC들이다. 개인 투자가들도 VC를 통해 투자놀이를 하고 연기금도 VC에게 위탁해 투자행렬에 참여한다. 연기금인 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학연금 등이 벤처 캐피털의 주요 재원이 된다.

실리콘밸리 하이테크 산업의 성공은 돈의 힘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은 또 돈을 낳고 계속 팽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난해 돈가방을 든 팰러앨토 VC의 손목에는 힘이 들어 있고 그들의 얼굴은 누런 황금 빛이었다.

VC들은 투자의 귀재들이다. 투자가 일단 결정된 벤처기업(start-up company)을 집중 지원해 IPO, 또는 인수합병(M&A)으로 연결하는 데 추종할 수 없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VC들이 자신의 자금관리에는 매우 허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백만달러, 때로는 수천만달러를 관리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 자신의 수만달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고 실리콘 밸리에 「묻지마 투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예 전무하다시피하다. 하이테크기업 투자 전문잡지인 「레드헤링」지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투자회사가 투자를 결정하는 비율은 평균 0.4%라고 한다. 상위 VC 중 하나인 「멘로벤처스」는 한 해 동안 접수된 투자요청 건수가 3000건을 상회하지만 겨우 10여개 회사에만 투자가 이뤄진다고 한다.

실리콘밸리 투자회사에는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에도 몇 건에서 수십 건까지 투자요청서가 접수된다. 하지만 추천받지 못한 제안서는 아예 검토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한다는 게 현지 VC의 말이다. VC와 연관 있는 전문가의 추천이 있어야만 심사대상에 올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리콘밸리의 돈을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조건은 인맥임을 보여준다.

어느 닷컴회사 사장이 자금유치를 위해 하도 무릎을 많이 꿇어 바지무릎에 구멍이 났다는 조크도 있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 벤처기업들이 실리콘밸리의 투자자금을 유치하기 위해선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

실리콘밸리에서 정장차림의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출장온 사람, 세일즈맨, 취업면담하러 가는 사람, 그리고 돈 다루는 사람만이 정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VC들도 정장을 하는 범주에 속한다. 정장은 싱글이다. 양복 상하의는 물론 구두와 양말, 넥타이까지 색깔을 맞춘다. 얼굴색을 고려한 색상도 선택한다. 심지어 그들이 들고 다니는 주요 액세서리인 가방색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갖는다.

VC들의 가방색깔이 작년에는 분명 누런 빛이었다. 가방에 돈이 가득해 가방 밖으로 삐져 나오면서 눈부신 황금 빛으로 보인 것이다. 팰러앨토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캘리포니아산 샤도네이 와인에 곁들인 스테이크를 즐기면서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많은 VC들의 얼굴은 분명 황금 빛이었다.

그러나 최근 투자회수율이 저조해짐에 따라 자금에 바닥을 보이는 VC도 있다. 투자처를 찾지 못해 개점 휴업중인 VC도 있다. 실리콘밸리 VC의 95%는 백인 계통이다. VC들의 얼굴빛이 이제 평상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의 가방색깔도 점차 황금 빛이 바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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