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취재기- IT가 희망이었네!>4회-전산화는 기술혁명의 높은 단계

7일 아침 8시 30분 남측 대표단 일행은 숙소 고려호텔을 나서 곧장 조선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 청사로 향했다.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고려호텔에서 민경련이 있는 대동강구역까지 거리는 약 7∼8㎞ 정도였지만 10분만에 도착했다. 서울 도심에서라면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평양의 아침 거리는 몇분마다 한대씩 다니는 궤도전차와 시내버스 그리고 간혹 눈에 띄는 일반 승용차 외에는 한산할 지경이었다. 시민들은 남녀노소 모두 두껍고 어두운 색깔의 방한용 파카에 목도리를 칭칭 감거나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총총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온통 회색에 검붉은 색의 정치선전문구들이 가득한 빌딩숲의 평양거리를 더욱 음산하고 황량하게 만들었다.

민경련은 보통문을 지나 평양시내에 6개가 있다는 대동강 다리 가운데 하나를 넘어 동평양지구에 있었다. 회색 타일이 박혀 있는 5층 민경련 건물은 여러 평양시내 건물과 마찬가지고 춥고 어두웠다. 2층 입구에서부터 중앙으로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회의실에 당도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붉은 카펫은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 같았다.

민경련은 명목상으로 정무원 무역상 산하 대남업무전담기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의 지휘를 받는 실권조직이었다. 업무 분장을 보면 아태가 정치·군사·문화를 담당하고 나머지 모든 경제협력분야는 민경련이 맡고 있는 형태였다.

회의실에서는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남측 대표단 8명과 북측에서 최주식 평양정보쎈터(PIC) 총사장, 김유종 PIC 기사장(부사장), 최경호 PIC 제2종합실장, 장우영 민경련 총사장, 강용철 아태 참사 등 10명이 마주보며 근엄한 자세로 앉았다. 공식 협상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북쪽이 정한 일정에 따르면 이날 오전에는 남측과 북측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를 하고 오후에는 장소를 PIC로 옮겨 PIC가 과연 남쪽기업들이 투자할 만한 상대인가를 직접 확인해보기로 돼 있었다.

북측은 일단 남측 대표단의 연령이 대부분 30∼40대 초반인 점에 대해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어디서 들었는지 남쪽에는 3000개 이상의 벤처기업가가 있다는데 모두가 이렇게 젊은 나이냐며 묻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북쪽 대표단은 모두 40대에서 50대의 연령이었다. 그들은 남쪽의 기업사회를 이끄는 층이 30∼40대라고 하자 부럽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PIC는 최주식 총사장이 15년 전인 1986년 7월 직접 당국에 건의해 설립된 소프트웨어 전문 개발센터였다. 남쪽의 기관과 비교하자면 196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한 조직으로 출범했다 나중에 독립한 시스템공학연구소(SREI)와 그 성격이 유사한 듯했다. 다음호에 설명하겠지만 PIC를 직접 설계한 최주식 총사장의 캐릭터 역시 SERI를 설립한 성기수 박사와 너무 닮아 있었다.

PIC의 주력 분야는 소프트웨어 개발과 유지보수였고 싱가포르와 도쿄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북측의 표준 워드프로세서 「창덕」, 조선글 입력처리 프로그램 「단군」, 조일(朝日) 번역 프로그램 「담징」, 2차원 CAD 「들」, 조합식 폰트 생성도구 「명필」, 문장인식 프로그램 「인식」, 실시간 무역정보처리 프로그램 「새별」 등 북측에서 널리 쓰이는 유명 패키지들이 모두 이곳 제품이었다. 평양시내 주요 기관과 외국대사관에 대한 시스템통합(SI) 용역도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PIC가 운영하는 부설 프로그램 강습소(교육센터)에서는 개발자급 이상 소프트웨어 전문인력을 연 500명씩 양성한다고 했다. 여기까가지가 최주식 총사장으로부터 들은 PIC에 관한 설명이었다.

오후 2시 PIC에 도착한 남측 대표단은 최 사장의 안내로 18개 연구실을 하나씩 둘러보기로 했다. 다과를 끝내고 견학할 첫번째 연구실을 향해 총사장 방을 나서려는데 문 옆에 액자로 장식돼 걸린 김정일 위원장의 「평양정보쎈터 일군들에게 보내는 감사문」이 눈에 띄었다. 1993년에 받은 것으로 돼 있는 이 편지는 『전자계산기화는 기술혁명의 높은 단계입니다』라고 시작되고 있었다.

<서현진 jsu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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