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亂世)는 영웅(英雄)을 부른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그러했다. 중국의 한 왕조가 망하자 전국 곳곳에서 영웅호걸이 등장했다.
그릇이 작은 게 흠이었던 원소도 있었고 때를 잘못 만난 공손찬과 같은 이도 있었으나 조조, 유비, 손권 등 세 군웅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인재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삼국시대」, 아니 「영웅시대」를 열었다.
16세기 섬나라 일본에서도 6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100년 넘게 싸도 넘게 서로 싸우는 전국시대를 겪었다. 이 때에도 어김없이 영웅이 등장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3인은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하며 일본인의 영웅이 됐다.
일본의 영웅이 저지른 침략으로 조선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비, 천민, 스님 가릴 것 없이 의병들이 궐기하면서 살아났다. 충무공은 혼란기에 등장한 영웅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줬다.
또 대혁명의 혼란을 잠재운 나폴레옹을 비롯해 레닌, 마오쩌둥과 같은 영웅들이 등장했다. 모두 혼란스러운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들먹이면서 나타났다. 천하의 독재자였던 히틀러도 패전후 혼란을 겪은 독일 국민에겐 영웅이었다. 이처럼 영웅은 난세에 등장한다. 역사의 물줄기를 극적으로 되바꾼 인물들이다.
21세기 들어 진정한 영웅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까. 평화시대라고는 하나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다. 사람들은 급격한 시대 변화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영웅이 탄생할 만한 시기인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종식되면서 정치적인 영웅은 사라지고 경제적인 영웅이 각광받고 있다. 군사력보다도 정보기술(IT)이 국가 경쟁력의 척도로 등장한 요즘은 빌 게이츠같은 IT 인물이 영웅시되는 시대가 됐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21세기 정보혁명의 큰 물줄기를 튼 인물이 아닌가. 그렇지만 다변화한 개방사회에서 그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던 이전의 영웅들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할 뿐이다.
동북아 IT산업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한국, 중국, 일본 3국에서도 마찬가지다. 3국의 IT산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이 분야의 걸출한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고 있다.
IT 영웅은 일본보다는 한국과 중국에서 더욱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그만큼 한국과 중국이 급속한 IT혁명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IT 영웅으로는 IT로 IMF위기의 돌파구를 마련한 김대중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현재 한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한 인물로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이건희 회장과 이윤우 반도체 총괄 대표 등 삼성전자의 수뇌들은 반도체와 LCD 신화를 이룩하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더욱 극적인 인물들은 인터넷 벤처회사 사장들이다. 딱히 누구라고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은 벤처신화를 열었다.
벤처기업가들은 무엇보다 재벌 위주의 한국 경제를 벤처기업 중심의 경제로 물줄기를 바꿔 놓고 있다. 이들은 아직 영웅이라기보다는 스타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의 뒤를 따르는 끊임없는 벤처 행렬은 머잖아 단순한 지류에서 「메인스트림」으로 바뀔 것이다.
고 이병철 회장과 고 최종현 회장을 비롯해 정주영, 구자경, 김우중 등의 재벌 회장들의 영웅시대는 이미 한참을 지났다. 김우중 회장은 이제 수배자 신세가 됐다.
물론 재벌 2, 3세들은 누구보다도 IT 영웅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으나 이젠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중국 역시 IT 영웅시대가 열렸다. 맨 앞에는 장쩌민 주석과 주룽지 총리가 서 있다. 특히 주룽지 총리는 개방과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중국의 IT혁명을 주도하면서 덩샤오핑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주룽지 총리가 머리라면 우지촨 신식산업부장은 손이다. 그는 중국을 새로운 IT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자국의 체질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지만 권력자들의 노력만으로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
중국에서도 이제 민간 IT 영웅들이 등장하고 있다. 유전지(柳傳志) 롄상그룹 총재를 비롯해 니룬펑 청홍전자 총재, 장루이민 하이얼 총재 등은 중국 기업가의 우상이다. 왕즈둥, 딩루이 등은 중국 인터넷 벤처창업가들에게 이미 영웅시됐다.
이들은 중국 정부가 정치적인 의도로 매스컴을 동원해 만들어낸 관제영웅인 「노력영웅」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실력 하나로 중원을 제패한 인물들로 중국의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이들과 같은 영웅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다. 이들 뒤에는 리카싱 청쿵 그룹회장과 같은 대자본가가 딱 버티고 서 있다.
그러면 일본은 어떨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세계적인 「i모드」 열풍을 몰고 온 오보시 코지 NTT도코모 회장이나 인터넷 벤처 투자의 귀재인 마사요시 손 소프트뱅크 회장 정도다.
지난 99년 타계한 모리타 아키오 소니 명예회장의 뒤를 이을 만한 대표적인 IT 영웅이 없다. 이는 일본 사회가 그만큼 안정화한 데다 개인보다는 집단 중심의 일본 사회풍토의 산물일 뿐이다. 고 모리타 회장도 튀는 개성으로 인해 사실 일본 재계에서 한때 따돌림을 받을 정도였다.
일본의 IT 영웅은 오히려 소니와 마쓰시타, 도시바, NEC, 후지쯔 등과 같은 개별기업이다. 다만 한국과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분위기 쇄신을 위해 일본은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가려 한다. 인터넷산업이 침체됐던 일본이 「i모드」 하나로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으로 용솟음쳤다.
오보시 NTT도코모 회장을 비롯해 i모드의 탄생에 참여한 인물들은 모두 영웅시되고 있다.
모리 요시로 정부도 이같은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다. 모리 정부가 올들어 본격 시행하는 「IT재팬」 전략도 상당부분 벤처창업가의 육성에 할애했다. 일본에서도 조만간 개인 IT 영웅이 등장할 것이다.
사람들이 영웅을 애타게 찾는 것은 현실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뭔가 모를 불안감과 공허감을 씻기 위해 누군가에게 위탁하려 할 때 영웅이 등장한다. 한국과 중국에서 IT 영웅을 갈구하는 것은 그만큼 IT산업이 핵심 산업이 됐으면서도 아직도 기반은 불안정함을 뜻한다.
지금까지 등장한 인물들은 아직 영웅이라고 부르기 힘들다. 스타에 가깝다. 스타가 영웅이 되려면 절대절명의 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어두울수록 영웅은 빛난다고 했다.
최근 한국과 중국의 IT산업은 난세에 직면했다. 특히 인터넷 벤처산업은 「바람앞의 호롱불」이다. 진짜 영웅이 등장할 분위기는 조성된 셈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지 의견은 분분하다. 이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은 일단 시대가 영웅을 만들고 만들어진 영웅이 시대를 이끌어 간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을 적용하면 지금 진행되는 IT혁명은 새로운 IT 영웅을 만들어간다. 누가 되는 이 영웅은 IT혁명을 더욱 가속화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IT 강국의 기치를 내건 한국과 중국, 일본은 새로운 IT 영웅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산업사회의 후퇴로 리더십 공백 사태에 직면해 새로운 IT 리더십을 창출할 인물을 찾는 데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이들 3국의 언론들은 성공한 벤처스타가 나올 때마다 「제2의 빌 게이츠」라는 수식어를 달 정도다. 한국과 중국에서 젊은 벤처기업가 가운데 IT 영웅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선 대기업에서 모리타와 같은 영웅적인 인물이 등장할 것이다.
IT분야에 어떤 풍운아가 등장해 어떤 리더십을 보일 것이냐에 따라 3국의 IT산업도 적잖은 변화에 직면할 전망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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