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커플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이지만 사랑을 나누는 방식은 왠지 예사롭지 않다. 이들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 상대방이 자신의 심장을 찾아 선혈을 힘껏 빨아들인다. 당연히 여기저기 붉은 피가 낭자하고 창백해지는 서로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살아있는 시체의 다른말인 「좀비」의 사랑을 묘사한 이 내용은 「엽기」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엽기」의 사전적 의미는 「괴이한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 97년 모 일간지를 패러디한 딴지일보에서부터 최근 네티즌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플래시애니메이션 「엽기 토끼」에 이르기까지 엽기는 단순히 「피가 튀는 하드고어」로 한정지을 수 없는 광범위한 문화코드가 됐다.
「엽기」라는 용어가 인터넷과 소설을 지나 최근 방송의 영역으로까지 퍼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남자 둘이 목욕탕에 간다. 한 사람이 등을 세게 문질러 주자 감정이 상한 나머지 한 명이 상대의 등을 수세미로 밀어버린다. 이에 질세라 철수세미가 등장하고 타일 청소용 솔·사포가 등장하더니 급기야 대패까지…. 이쯤되면 때를 미는 게 아니라 포를 뜨는 수준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장면은 얼마전 케이블TV에서 방영됐던 「종횡무진 엽기시대」라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물론 마지막 단계에서 정육점 수준의 실제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 보지만 선뜻 할 수 없었던 일」을 출연자들이 대신 해보는 프로그램인 만큼 황당하고 끔찍한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높은 곳에서 다리뼈 위로 떨어지는 당구공의 충격을 누가 잘 참는가, 물엿으로 머리 감고 향수 대신 후추를 온몸에 뿌리는가 하면 생미꾸라지가 들어있는 붕어빵을 먹기도 한다.
「방송도 많이 발전(?)했다」라고 느끼게 하는 이 프로그램은 겨우 5회 방영을 끝으로 자진 폐기됐다. 혐오스러운 내용 등을 방영했다는 이유로 방송위로부터 시청자 사과명령 등을 받은 끝에 내려진 결론이다.
이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던 코미디TV 이건영 PD는 『인터넷에서처럼 극단적인 엽기는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상상만으로 그치는 여러가지 상황들을 현실화함으로써 기존 코미디의 벽을 넘고 싶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종횡무진 엽기방송」의 단명을 계기로 극단의 경계를 정의함에 있어 케이블TV와 지상파 방송사의 엽기방송을 동일선상에 놓고 봐야 하는지 채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엽기는 지상파 TV에도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 쇼프로그램에서 「건강주스 마시기」는 별스러울 것도 없는 코너가 돼 버렸다.
게임이나 퀴즈에서 진 팀이 간장·생강·콜라·마늘 등 각종 재료가 배합된 「건강주스」를 마셔야 한다. 보는 사람이 끔찍한 맛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제조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필수다.
건강주스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시들해지기도 전에 각 방송사는 쇼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온통 엽기적인 벌칙과 볼거리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상자 속에 들어있는 혐오동물 만지기나 개미 같은 혐오음식 먹기는 귀여운 편. 연예인이 나와 목으로 철사를 구부리는 아슬아슬한 차력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일단 엽기프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좀더 강도를 높여라』라는 극단적인 주문에서부터 『너무 한 것 아니냐』는 불만까지 방송사 게시판은 연일 뜨거운 논쟁의 장이 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위험한 상황을 연출해내기라도 하면 다음날 게시판에는 항의 메일이 폭주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이 높은 만큼 비난여론도 거세지고 있다. 인터넷을 탈출한 엽기가 방송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괴기스러움과 저질 사이에서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
엽기 마니아와 엽기잡지·엽기 동호회가 형성될 정도로 명확한 색을 갖고 있던 엽기문화가 방송의 제한된 틀 속에서 「가학적인 저질 행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서울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안수경 간사는 『모든 프로그램이 출연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놀리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하려 하는데 문제가 있다』며 『방송사들이 소재 고갈로 인해 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내용을 찾다 보니 극단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인간의 골수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엽기적 상상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려면 아직 그 표현의 수위와 방법에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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