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진 논설위원 jsuh@etnews.co.kr
기업이 위기에 빠졌을 때 빛나 보이는 것이 바로 탁월한 최고경영자의 역할이다. 우수한 차의 성능이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달릴 때보다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입증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구성원들이 방향을 잃고 헤맬 때 향도로서 CEO는 위기탈출의 구심점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최고경영자를 의미하는 영어 이니셜 CEO의 풀이를 보면 그 뜻은 더욱 명확해진다. 즉 C(Chief)는 기업과 운명을 같이하고 책임을 지는 마지막 보루라는 뜻이고, E(Executive)는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는 의미다. 또 O(Officer)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 기업의 중심적 기구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CEO의 자질과 성향은 이 세가지의 뜻을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해석하고 조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위기 때 CEO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 바로 미국식 경영이다. 그래서 미국식 경영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업이익의 회복이다. 일대 위기에서 기업을 살려낸 CEO 영웅들로는 IBM의 거스너 회장, 제너럴모터스(GM)의 스미스 회장 등이 손에 꼽힌다. 둘을 놓고 경영분석가들 사이에서 거스너를 빼고 IBM의 위기극복을 설명할 수 없고 스미스 없는 GM의 부활을 상상할 수 없다고 평가할 정도다.
거스너는 연간 적자가 80억달러에 달하던 IBM을 취임 다음해부터 30억∼50억달러 흑자기업으로 전환시킨 인물이다. 적자(위기)의 본질을 감원하는 등 수지개선 노력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과거 IBM을 일류기업으로 키웠던 창업정신, 즉 「IBM은 서비스 그 자체(IBM means service)」라는 슬로건을 다시 표방하기로 했다. 짧아지는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에 매달리기보다는 고객의 신뢰확보라는, 원론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산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던 것이다.
스미스는 위기의 원인이 공룡화 된 조직이라고 판단, 과감한 슬림화를 통해 GM을 부활시킨 경우다. 그는 공룡적인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취임 후 1년을 고위경영진의 교체와 적자사업부문의 정리 등 구조개혁에 쏟아 부었다. 슬림화를 문제삼는 노조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스미스의 모토는 「살아남기 위해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식 경영은 관료주의 경영의 우수성을 자랑하던 일본 기업들뿐 아니라 절차성과 합리성을 강조해온 유럽 기업들에도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표적인 CEO들로는 10년 계획의 구조조정을 단 3년 만에 끝낸 폴크스바겐의 피이히 회장, 130년 된 제지회사를 세계 최고의 통신회사로 탈바꿈시킨 노키아의 올리라 회장 등이 꼽힌다.
일본에서는 「관료주의형 위기」로 진단하고 이른바 60대 기수론을 주창했던 도요타의 오구다 사장, 회사를 「지진아(遲進兒)」 상태라고 진단하고 『중역들은 모두 현실의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라』고 했던 도레이의 마에다 사장 등이 널리 알려진 미국식 경영방식의 신봉자들이다.
우리나라 역시 90년대 초반부터 많은 기업들이 미국식 경영을 도입하고 강력한 CEO 리더십을 주창해 왔고 이러한 움직임은 IMF 이후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위기의 기업을 구해냈다는 CEO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92년 불명예 퇴진한 아이아코카와 그 뒤를 이어 크라이슬러의 지휘봉을 이어받은 이튼을 놓고 독일의 한 언론은 이렇게 표현했다.
「아이아코카 자신의 맵시를 한껏 뽑낸 화려한 「임페리얼」 승용차라면, 이튼은 자신의 길만 묵묵히 달리는 「랭글러」 지프다.」
지나지게 독선적이며 화려한 언론플레이를 즐겼던 아이아코카를 빗대어 한 말이다. 말로는 위기라고 외치면서 본격적인 역할과는 거리가 먼 CEO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프로가 될 수 없다. 진정한 CEO 영웅의 첫번째 역할은 바로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일이다. 방향을 설정하고 생존체력을 확보하며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핵심역량을 재설정하는 일은 그 다음의 역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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