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과학에 기초한 21세기 기틀을 마련하자

◆강주상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은 끊임없이 개발되고 곧바로 응용된다. 그런데 초기에는 과학 연구를 통해 기술 개발이 이뤄진다. 대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기술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속한 성숙 과정을 거쳐 산업에 응용이 보편화하면서 학습 곡선의 고지에 이르게 된다. 그 이후에는 새로운 기술로 교체된다. 「진공관-트랜지스터-집적회로」의 변환 과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기술 수명이 점점 짧아진다는 것이다. 21세기는 흔히 지식기반사회라고 하는데 지식에 근거한 기술일수록 기술 단명현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개인·회사·국가 할 것 없이 새로운 지구촌 사회의 정보화 조류에서 떠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활용할 수 있는 개인 기술, 대대로 번영할 수 있는 회사 기반, 국가의 100년을 내다보는 혜안이 절실한 것은 물론이다.

기술 단명추세를 피할 수 없다면 탄력성 있게 환경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과학기술정책 면에서는 산업에 곧바로 이용될 수 있는 단기적 기술 개발과 중기적 기술 개발에 필요한 공학 연구, 장기적 기술 혁신에 기여할 과학 연구가 모두 똑같이 중요하고 균형을 이뤄야 한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한 산업 발전을 이룩했다. 주로 값싼 노동력과 외국 기술 도입에 힘입은 바 기술 개발은 충분치 못했고 기초과학을 소홀히 했다. IMF 같은 국가 위기상황을 여러 시각에서 볼 수 있는데 장단기 기술혁신의 부족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이해하려는 풍조는 기술 패권의 세계 조류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기초과학이 경제 성장으로 직결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초연구 결과가 장기적 기술혁신을 통해 산업 응용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해방 이후 역대 정부는 과학기술에 큰 비중을 뒀고, 특히 90년대에는 정부 투자가 일반 예산 증가를 훨씬 앞섰다. 그렇지만 아직도 기초과학은 세계 수준에 못미친다. 그 수준을 단기적으로 보여주는 우수논문 발표 실적에서 양적으로는 세계 16위, 질적으로는 세계 60위다. 우리 국민총생산(GNP)이 10위권 내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낙후한 것이다. 기초과학 수준의 장기지표인 물리·화학·생명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한 명이라도 배출한 국가는 34개국인데 한국은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노벨과학상 배출국은 경제선진국이거나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깊은 나라들인데 우리가 얼마나 과학을 등한시했는가 입증된다.

과학 발전을 위해 과감한 국가 투자 증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에 앞서 올바른 과학기술정책이 필요하다. 우선 과학을 중시하는 사회 인식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강조할 점은 창의적 과학 교육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환경에서 창의적 사고가 억제되고 또한 대학 입학 후 가장 창의적 두뇌 활동을 할 20대에 병역의무로 공백을 갖는 것은 기초과학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가는 올바른 과학기술정책으로 과학 발전을 선도해야 한다. 투자 증대도 필요하지만 이는 한 가지 요건에 불과하다. 오히려 투자 증대에 따른 관련부처의 연구관리제도 경직화로 과학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연구 효율이 낮아지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경쟁과 다양화 논리를 외면하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목하에 국제 경쟁에 약한 국내 하부구조를 조성하는 것은 그동안 그나마 조성된 국내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 인력이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두뇌 자원이 가장 효용성이 높고 과학기술자가 바로 두뇌 자원인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자를 경비 절감이 필요하면 쉽게 조절할 수 있는 소모성 자원으로 다루지 말고 운영이 어려울수록 중시하는 자산성 자원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면서 지구촌 사회는 급변하고 있다. 19세기는 산업혁명으로, 20세기는 전기문명으로 인류문화의 발전을 이끌었다면 21세기에는 정보사회가 주역이 될 것이다. 그 중심에서 과학 발전은 더욱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과학에 뿌리를 둔 새로운 세기에 지식기반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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