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업체를 그렇게 욕하더니, 한국 업체들은 한술 더 뜨는 군. 그나저나 이제 어찌한다….』
천 시엔삔(陳炫彬) 에이서디스플레이테크놀로지(ADT) 총경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ADT는 대만의 세계적인 컴퓨터업체인 에이서가 설립한 TFT LCD 회사다. 천은 이 회사의 사장을 맡고 있다.
그를 비롯한 대만 TFT LCD 업체 사장들을 골아프게 만든 것은 한국 업체들의 가격공세다. 공세는 하반기 들어 부쩍 거세졌다.
사실 가격싸움을 먼저 건 쪽은 올초 대만 업체들이다. 그래서 한국 업체의 반격에 뭐라 말할 자격도 없다. 그렇기는 하나 총공세가 이 정도로 강력할 줄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삼성전자·LG필립스 두 회사는 대만업체를 겨냥한 듯 저가정책을 펼치고 있다.
노트북PC용 13.3인치 TFT LCD의 가격은 어느덧 35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올초까지만 해도 500달러를 웃돌던 제품이다. 가격은 앞으로 더 떨어져 올 연말에는 320달러 안팎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대만 제품은 한국 제품에 비해 싸다. 한국 업체가 320달러 정도에 팔면 대만 업체는 310달러에 팔아야 한다. 원가에 못미쳐도 팔아야 하는 게 이 사업의 생리다. 대만 업체들은 후발 주자로선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설움을 톡톡히 경험하고 있다.
대만 업체가 TFT LCD를 본격 생산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감가상각이 끝나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한국 업체들은 다르다. 감가상각을 어느 정도 처리한 상태에서 제품을 생산한다. 생산성도 높다. 대만 제품보다 제조원가가 훨씬 낮다.
천 총경리는 한국 업체들의 공세를 일단 대만 업체 죽이기로 보고 있다.
『가격이 떨어지면 스스로도 좋지 않을텐데 오히려 물량을 더 내보내 값을 떨어뜨리다니, 지독하구먼.』 그는 사업 초기 일본 업체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던 한국 반도체를 떠올렸다. TFT LCD에 비하면 반도체는 양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러나 요즘 일부 한국 업체 관계자 사이에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가격, 더 떨어져도 돼.』
대만 TFT LCD 업체에 가격하락만 골칫덩어리는 아니다. 일본 업체들의 기술이전이 생각보다 신통치 않다.
그럭저럭 시장에 내놓을 만큼 생산하고 있으나 생산성 향상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다. 선진 생산 노하우를 더 배워야 한다. 그런데 제휴처인 일본 업체들은 더 이상 가르쳐 주려 하지 않는다.
대만 업체들은 진짜 기술을 주는 데 인색한 일본 업체들이 괘씸했다. 끌어들인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일본 업체들이 「제 코가 석자」라고 대만 업체들을 내팽개치다시피 한다. 불현듯 이런 생각도 한다. 『일본 업체들이 장비하고 부품 팔아먹으려고 우리를 끌어들인 거 아냐.』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국 업체들도 그러한 단계를 거쳐 크지 않았는가. 한국도 참았는데 우리도 참아보자. 1∼2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문제는 대만 업체들의 시장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이다. 가격하락은 예상했던 것이지만 하락폭이 생각보다 컸다. 그래도 수요는 나쁘지 않아 생산만 잘 하면 되는데 부품을 구하기 힘들다. 드라이버IC·컬러필터 등 핵심부품 공급업체들이 도대체 대만 업체들을 신경쓰려 하지 않는다. 얼마 안되는 부품이 죄다 한국과 일본 업체에 몰린다.
대만 증시도 썩 좋지 않다. 사업을 시작했을 때와 달리 자금줄도 막히고 있다. 앞으로도 더 쏟아부을 게 많은데 「총알」이 없다.
『이러다가 시장이 정작 커질 때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은 아닌가.』
천 총경리의 이같은 걱정은 『한국 업체와도 협력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대만TFTLCD협회(TTLA) 이사장인 그는 회원사 사장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들의 견해도 비슷했다.
곧바로 한국의 업계 단체와 접촉했다. 뜻밖에 한국측은 긍정적으로 나왔다. 한국 업계로선 잘 나가는 사업에 뒤늦게 뛰어들어 가격만 떨어뜨린 대만 업체들이 미운 오리새끼였다. 그렇지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대만을 심하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고 봤다.
그래서 한국 업계는 최근 대만 업계와 상호 협력키로 일단 합의했다.
일본 업체들도 애초 전략과 어긋나는 상황에 당혹해했다. 일본 업체들의 계획은 대만 업체를 끌어들여 한국과 싸움을 시키고 그 틈을 타 일등 생산국의 위치를 다져 놓으려는 것이었다.
일본 업체들은 겉으로 한국 업체들에 양국 생산체제가 됐으니 서로 협의해 시장을 만들어 가자고 했다. 어쨌든 후발주자인 한국 업체로선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가 했더니 일본 업체들이 덜컥 대만 업체들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일본 업체들은 한국 업체와 협력의 손길을 내밀면서 다른 손으로는 대만 업체들의 손을 잡았다.
샤프는 퀀타, 도시바는 한스타와 기술 및 생산협력 관계를 체결하고 양산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또 후지쯔는 치메이와, 일본IBM은 ADT, 미쓰비시는 CPT, 마쓰시타는 유니팩과 협력중이다.
일본의 이같은 행위는 한국 업체들로 「일본 타도」의 의지만 북돋았다. 한국 업체들은 일본 업체들의 행위에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다. 대만 업체들은 얼떨결에 끼어든 희생양일 뿐이다.
그런데 급격한 가격하락과 부품품귀는 대만 업체들을 부진으로 몰았고 오히려 한국 업체의 입지만 커졌다.
일본의 주요 TFT LCD 업체 중역들은 지난 25일 요코하마로 몰려들었다. 평판디스플레이 전시회 참관을 겸해 열린 비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서 각 업체의 사업부장들은 이대로 가다가 시장 주도권을 영원히 한국 업체에 넘겨줄 수 있다는 상황인식을 같이 했다. 한국의 삼성과 LG필립스는 저마다 차세대 규격에 대한 투자에 들어갔는 데 반해 활발히 투자하는 일본 회사는 고작 샤프뿐이었다.
당장은 괜찮더라도 내년말 이후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면 한국 업체들의 독주가 불보듯 뻔하다.
사업부장들은 투자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안정화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서둘러 만들어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려면 시장 1, 2위인 한국 업체와도 협력해야 한다.
일본 업체들은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약간 수정키로 했다. 한·일·대만 3국 협의체를 만드는 데 적극 참여키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업체들이 「한국 타도」라는 전략을 버린 것은 아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 뿐이다.
한국 업체들도 이러한 전략을 너무나 잘 안다. 대응전략은 크게 두가지다. 대만뿐만 아니라 일본 업체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시장을 독식하거나 서로 협력해 「파이」를 크게 하는 것이다.
당장의 시장 상황은 일단 전자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으나 무리수가 될 수도 있어 선 협력하는 쪽이 낫다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시장 전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TFT LCD 업체 경영자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소극적인 전법을 쓰기보다는 내년 하반기 시장이 호전될 때에 대비해 공격적인 전법을 구사하고 있다.
지난달초 한국의 디스플레이 업계와 학회는 서울에서 국제디스플레이제조학회 행사를 열었다. 제조분야에서 더이상 한국을 넘보지 말라는 일본을 향한 메시지였다. 또 LG필립스와 삼성전자가 잇따라 5세대 투자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일본 업체들은 LG필립스LCD가 지난 6월 미국 APC사와 10억달러 규모의 항공기용 TFT LCD 공급계약을, 이에 앞서 삼성전자가 지난해 델컴퓨터와 무려 85억달러짜리 수출계약을 발표할 때 기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업체들이 5세대 투자를 선언하자 일본 업체들은 잔뜩 주눅이 들었다.
대만 업체들은 대만 업체들대로 움직인다. 대만 업체들은 자신들을 관심밖으로 보는 한국 업체들에 얼마간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당장은 한국 업체에 비해 기술력과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앞으로 한국 업체만큼 잘 키울 자신이 있다고 다짐하면서 업체간 공동대응에 나서고 있다.
협력도 활발하다. 중화영관(CPT)·ADT·유니팩·한스타·치메이 등 주요 업체를 모두 망라한 단체인 TTLA를 설립한 것도 상호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발족식은 한국의 TFT LCD 업체들이 세계시장 1, 2위에 올랐다는 어느 시장조사기관의 발표가 나온 다음날인 지난 2월 18일에 열렸다.
그날 발족식에서 대만 경제부의 고위관리는 축하연설을 통해 『TFT LCD산업을 반도체산업에 이어 제2의 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대만 정부의 TFT LCD 산업 육성 의지는 매우 강력하다. 관련 수입장비에 대해서는 관세를 거의 매기지 않으며 전자공업연구소(ERSO)를 비롯한 국책 연구소에서 기초기술을 연구하는 데 연간 1억달러 이상을 지원한다.
한국이 그러했듯이 대만도 「제2의 반도체 신화」를 만들려 한다. 필요하다면 최근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중국과도 협력할 태세다.
한국 업체들의 대응은 의외로 차분하다. 광시야각·고속응답·고해상도의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대만 업체들과의 시장 및 기술 격차를 벌리는 것은 물론 일본 업체들도 제친다는 전략이다.
한국의 LCD 경영자들은 『대만을 끌어들인 건 일본의 실수가 될 것』이라면서 『시장에서 탈락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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