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4회-적을 동지로...

가뜩이나 IMF한파로 추웠던 지난 98년 1월초, 서울 김포공항. 몸집 좋은 한 유태인이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뿌리치며 검은색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세계 금융계의 풍운아, 조지 소로스 미국 퀀텀펀드그룹 회장이다.

천의 얼굴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어떤 이는 그를 사상 최고의 국제 금융 전문가로 여긴다. 또 그를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도 있다. 실천하는 경제사상가로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진짜 얼굴을 알지 못했다.

소로스의 서울행은 새로운 청와대 주인의 부름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 당선자는 전임 대통령이 텅 비워놓은 곳간을 채울 방법을 찾기 위해 밤잠을 못이루던 터다.

그러다가 김 당선자는 문득 옛 후원자인 소로스를 생각해냈다. 월스트리트의 거물로 성장한 소로스는 아·태재단에 후원금을 내기도 한 친 DJ 인사다. 소로스의 방한에 야당과 일부 언론은 냉소적이었다. 『어찌 대통령 당선자가 중요한 일을 제쳐놓고 국제 투기꾼부터 불러들인다는 말인가.』

사실 조지 소로스에 대한 국제적인 평판은 좋지 않다.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의 그에 대한 시각은 「증오」에 가까웠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가만 안두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태국이나 러시아 등도 소로스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이들 나라는 자국의 금융위기가 소로스의 외환 작전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인물을 귀빈으로 모시다니…. 야당이 아니라 해도 적잖은 사람들은 김 당선자의 초청 의도에 의문을 가졌다.

궁금증은 두 사람이 점심을 들며 나눈 얘기가 알려지면서 점차 해소됐다. 김 당선자는 글로벌 시장 경제에 맞게 불필요한 규제나 제도를 없애겠다고 말했다. 소로스는 김 당선자가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국제 금융을 한국쪽에 몰아주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며칠 뒤 김 당선자측은 외국인 투자를 억제하는 외환관리법의 개정을 밝혔다. 한달뒤에 소로스는 자신이 운영하는 퀀텀펀드를 통해 한국 증시에 상륙했다.

김 대통령이 소로스에게 자문하는 모습은 마치 조조(曹操)의 용병술을 떠올리게 한다.

조조가 한(漢) 말기에 원소(袁紹)와 화북(華北)지역의 패권을 놓고 겨룰 때다. 부하 하나가 원소와 내통했다. 조조는 그 증거인 편지를 갖고 있었으나 어느날 뭇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편지를 불태웠다.

죽었다 살아난 배반자는 조조에게 충성을 바쳤다. 관용으로 적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의 적절한 예다.

김 대통령은 나쁘게 말하면 국제 투기꾼인 소로스를 끌어안아 외환 부족에서 비롯된 한국의 금융위기를 벗어날 길을 만들었다.

김대중 당선자와 소로스 회장의 만남 이후 샌퍼드 웨일 미국 트래블러스 회장을 비롯해 미국의 금융계 거물들이 잇따라 방한했다.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던 미국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무디스 등에서도 사람들이 와 실사작업을 벌였다. 미국 금융계를 좌우하는 실력자 가운데 하나였던 당시 제임스 리치 금융재무위원장도 한국에 왔다.

이들은 『한국이 다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구나』는 마음을 갖고 귀국했다.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채 몇 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소로스의 뒤를 따라 대규모 국제 자본이 한국에 몰려왔다.

외국인 투자가 살아나자 외환 부족으로 비롯된 경제위기의 먹구름은 점차 걷히는 듯 했다. 그렇지만 점차 구름의 이동이 둔해졌다. 머니 시장 자체가 좀처럼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으로 공식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재벌개혁이라는 큰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대안 찾기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외국인들이 투자할 만한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 등 몇몇에 불과했다. 이들 회사의 주식만 산다 해도 전체 주식시장이 침체돼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국민의 정부는 「벤처기업과 같이 참신한 기업들로 머니 시장을 키우자」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더욱이 김 대통령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던가.

정부는 벤처기업과 코스닥 활성화를 위한 과감한 육성책을 잇따라 펼쳐 보였다. 때마침 인터넷·디지털 바람이 불면서 정보기술(IT)관련 벤처기업들이 부각되고 있었다.

청와대로 들어간 김 대통령은 시간을 쪼개 국내외 벤처기업가와 IT업체 거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손정의 등과 이종문 암벡스벤처그룹 회장 등 IT업계의 거물들이 내한하면 당연코스로 청와대행이었다.

신정부가 IT벤처를 IMF 탈출의 엔진으로 삼게 된 것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선택일지 모른다.

WTO체제에서 종전처럼 정부 주도의 산업을 육성하기 힘들다. 육성할 만한 기업들은 주로 대기업뿐이다. 중소기업 위주의 정책을 내세운 신정부의 정책으로는 맞지 않는다. 더욱이 신정부는 IMF의 주범으로 몰린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바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소기업들을 집중 육성하자니 전반적으로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공산이 크다.

딜레마에 빠진 신정부에게 IT벤처의 등장은 「복음」이었다. 더욱이 갈 곳 몰라하는 검은 돈들도 벤처기업에 관심이 많았던 터다.

벤처기업 1만개, 120만명의 일자리 창출 등 다소 거창한 벤처지원정책이 잇따랐으며 코스닥 시장도 크게 달아올랐다.

소로스는 투자 1년 만에 무려 2800억원이라는 거액을 한국에서 벌여들였다. 투자치고는 아주 괜찮은 투자였다. 이해관계말고도 김 대통령과 소로스를 끈끈하게 만든 것은 세계를 보는 눈이 같아서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함께 가는 자전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당시 등장한 새로운 이론 「제3의 길」과 맥을 같이 한다.

「제3의 길」은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의 앤터니 기든스 총장이 주창한 이론으로, 이념 대립이 사라져가는 시대에서 기존의 체제를 아우르는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이 주장을 정책 방향으로 선언했으며 빌 클린턴도 블레어에 동조했다.

클린턴은 민주당원이면서도 공화당의 보수적인 정책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정책이 미국민에게 먹혀들면서 골치 아팠던 「섹스 스캔들」도 묻혀져 갔다.

김 대통령이 선택한 것도 「제3의 길」이다. 김 대통령의 고민은 외국인 투자 유치의 걸림돌인 구조조정과 노사안정을 어떻게 빨리 이루느냐였다.

외국인들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한국의 노사분쟁을 보며 투자에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김 대통령은 묘한 위치였다. 다른 정당에 비해 노조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아 집권했으나 IMF 극복에는 노조의 양보를 요구해야 하는 입장이다.

집권한 김대중 정부가 선택한 것은 노도, 사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사측에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노측에는 고통분담으로 이해를 구했다. 오랜 논란 끝에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이후 외국인의 투자는 봇물을 이뤘다.

김 대통령은 대선 패배 직후였던 9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칩거했다. 그 시절 앤터니 기든스는 케임브리지에서도 스타 교수였다. 헝가리 출신인 소로스도 케임브리지에서 유학한 인물이다.

김 대통령의 IMF 탈출 해법이 얼마간 「제3의 길」 이론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IMF체제가 가져다준 고통은 컸다. 도시의 공원들은 갈곳 없는 실직자들로 넘쳐났다. IMF형 범죄도 많아져 사회 불안도 극심해졌다. 멕시코 등 IMF체제의 선험자들이 겪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불굴의 의지가 있었다. 눈물 겨운 금모으기 운동은 지구촌을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외국인 투자가 다시 증가하면서 증시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안방 깊숙이 숨겨졌던 개인 금고가 열렸다. 꽁꽁 얼어붙었던 자금줄이 풀리면서 기업들의 투자 의욕도 다시 지펴졌다. 한국 경제는 회생하기 시작했다. 신경제시대가 열린 것이다.

인터넷과 디지털을 축으로 한 국내 전자업체들은 그 최대 수혜자가 됐다. 국내 전자제품 수출을 주도하는 반도체 경기도 오랜 침묵을 깨고 99년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IMF 이전과 달라진 것은 전자업체들의 체질이 한결 좋아졌다는 점이다. 전자업체들은 극한 상황에서 거품을 빼 자생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또한 떠오르는 디지털산업에 집중하는 전략을 폈다.

그 사이 중국의 전자산업이 급성장했으나 한국의 전자산업도 그만큼 업그레이드됐다.

반면 일본의 전자산업은 정체됐다. 일본 전자산업은 다행히 이웃나라와 같은 IMF체제를 경험하지 않았으나 체질을 개선하는 기회를 놓쳤다.

전부는 아니나 디지털 전자산업에서 한국 업체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분야도 생겼다. 인터넷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극적으로 IMF체제에서 탈출했다. 물론 평가가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가 초기와 같은 개혁이 지속되지 않으면서 다시 거품이 생기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기업들은 변하고 있으나 금융과 관료는 아직 변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2000년 하반기, 「제2의 IMF가 온다」는 위기설도 터져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부의 중간평가에서 적어도 국내 전자정보산업의 위상은 IMF 이전보다 높아졌다. 여기에는 일부 전자업체의 퇴출이라는 비싼 수업료도 냈으나 살아남은 기업들과 벤처기업들의 힘은 예전보다 더욱 세졌다. 다시 정비한 일본 및 급부상하는 중화권과 충분히 겨룰 만한 잠재력을 갖췄다.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는 한국 전자산업이 이웃나라들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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