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전만 해도 방송·영화·음반사업 등을 종합적으로 운영하는 공룡 미디어기업들 앞에 장애물이란 없어 보였다.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경쟁업체들을 하나둘 삼켜갔으며 이들이 보유한 위성방송 네트워크는 「전파월경」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먼 옛날 공룡들이 기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멸종됐듯이 종합 미디어기업들은 지금 변화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모든 변화는 인터넷에 의해 시작됐다. 한번 번지기 시작한 인터넷 열풍은 IT업계뿐 아니라 미디어업계에도 불어닥쳤다. 인터넷은 21세기 뉴미디어의 하나로 자리잡았고 TV라는 「천하제일」의 미디어를 위협하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제 사람들은 네트워크라는 말을 들으면 방송국이 가지고 있는 방송 네트워크를 떠올리는 대신 데이터가 오가는 IP 네트워크를 생각한다.
인터넷은 기존 미디어에 「양방향」 개념을 추가시켰다. 수용자라는 테두리에 묶여있던 시청자와 독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게 됐으며 심지어는 자신만의 방송국을 만드는 「1인 방송국」시대가 열렸다.
또한 인터넷은 음반사들이 수십년간 벌여오던 불법 음반과의 전쟁에서 음반사에 치명적인 펀치를 날렸다. 냅스터, MP3닷컴 등의 온라인 음악사이트가 중앙의 통제가 불가능한 인터넷의 특성을 이용해 세력을 넓혀 대형 음반사의 최대 적수로 부상한 것이다.
인터넷이 무시할 수 없는 뉴미디어로 떠오르자 공룡 미디어기업들은 변화를 모색케 되었다.
CNN, 워너브러더스, 워너뮤직을 보유하고 포천·피플지 등을 발행하는 세계 최대 미디어기업 타임워너는 2000만명이 넘는 가입자를 보유한 세계 최대 인터넷업체 AOL과 지난 1월 합병을 선언했다.
최고의 콘텐츠를 보유했지만 인터넷과의 고리를 가지지 못했던 타임워너와 다양한 인터넷서비스를 위해 양질의 콘텐츠 확보가 시급했던 AOL의 요구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들의 합병은 AOL이 타임워너를 인수하는 형태를 띠어 결국 온라인업체가 오프라인업체를 정복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미디어업계의 또다른 메가합병은 프랑스의 비방디그룹과 캐나다의 시그램 사이에 이루어졌다. 유럽 최대의 유료채널 카날플러스를 운영하고 있는 비방디는 지난 6월 유니버설픽처스, 유니버설뮤직 등을 보유한 시그램을 인수했다.
양사의 합병은 비방디가 프랑스 2위 이동통신업체 SFR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AOL-타임워너 합병과는 차별성을 갖는다. 비방디는 세계 최대 이동통신업체 보다폰에어터치와 무선인터넷 합작사를 설립하는 등 「인터넷+통신」업체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즉, 종합 통신·미디어기업으로의 부상을 꿈꾸고 있는 비방디에는 보다 다양한 콘텐츠가 필요했고 시그램은 이에 딱 들어맞는 인수 대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비방디의 무선인터넷사업용 콘텐츠 수급을 위해 또하나의 미디어기업이 먹잇감이 돼버린 것이다.
미디어기업이 인터넷·통신업체에 잇따라 인수된 사례들은 더 이상 미디어기업이 예전의 명성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남은 과제는 미디어기업들이 어떠한 변화를 추구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업계 1위 타임워너를 뒤쫓던 중에 비방디-유니버설의 부상으로 위기를 맞은 뉴스코포레이션, 월트디즈니, 베르텔스만 등은 하루빨리 협력 상대를 결정해야 한다. 언론재벌 머독의 뉴스코포레이션은 NBC방송 인수를 꾀하고 있으며 야후와의 협력 강화도 추진하고 있다.
ABC, ESPN, 미라맥스필름 등을 보유한 월트디즈니는 AOL-타임워너 합병 후 야후에 인수될 것이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지난해 포털사이트 「고닷컴」을 시작하며 AOL과 야후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점이 약점으로 지적됐기 때문이다. 월트디즈니는 현재 고닷컴을 포털이 아닌 연예·오락에 특화된 사이트로 탈바꿈시켜 인터넷 시장에 재도전하고 있다.
출판업체로 시작, 세계적인 미디어기업의 반열에 오른 독일의 베르텔스만은 당초 AOL의 첫 인수협상 대상이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협상결렬 후 AOL과의 합작사였던 AOL유럽의 지분(50%)을 전량 매각한 베르텔스만은 최근 온라인 음반판매업체인 CD나우를 인수했다. 하지만 온라인 출판사업에서도 아마존의 성공 후 뒤늦게 뛰어들어 고전했던 베르텔스만이 급변하는 뉴미디어시장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1세기 뉴미디어 시대에 막 들어선 지금 어떤 미디어기업이 패권을 차지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몸불리기에만 급급했던 미디어기업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인터넷·통신업체와의 제휴를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어느 쪽이 승리자가 될 것인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지금 종합 미디어기업에는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아 상호보완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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