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가 유통망을 확고하게 쥐고 있는 국내 가전시장에서 과연 유통업체가 가격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겠습니까. 잘 나가는 제조업체가 물건을 안주면 우린 어쩝니까.』
가전유통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 양판점의 고위관계자는 오픈프라이스 제도가 시행된 지 1년을 맞고 있으나 당초 취지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제조업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오픈프라이스의 취지는 가격담합이나 재판매 가격 유지 등 제조업체의 불공정 거래행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소비자의 구매권을 보호한다는 것.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아직까지는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오픈프라이스제는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유통업계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어찌됐든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 오픈프라이스제와 매출액은 별다른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오픈프라이스제를 시행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역시 유통점간 가격경쟁을 통한 「가격결정권의 하부이양」이었다. 유통점이 궁극적으로 가격을 결정해 판매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과연 제도 시행 1년이 된 시점에서 정부의 이러한 구상은 어느 정도나 효과를 거두었을까. 이는 전국에 220개의 지점을 확보해 구매력이 가장 큰 하이마트 관계자의 말로 쉽게 설명된다.
『오픈프라이스제가 시행되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게 없습니다. 다만, 판촉활동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50여개 직영점을 둔 전자랜드 역시 가격결정권은 넘겨받지 못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제조업체와 가격에 대해 협상은 하지만 어디까지나 흥정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다.
용산 전자랜드 1층에서 LG전자 대리점을 운영하는 A사장은 『본사에서 공급해주는 가격으로는 10% 내외의 마진도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가격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결국 「가격결정권의 이양」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오픈프라이스제로 인해 유통업체들의 판촉활동은 크게 달라졌다. 대상품목은 권장소비자가격을 표시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종전처럼 「권장소비자가 대비 ○○% 할인판매」라든지 「○○% DC」 등의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난 1년동안 하이마트와 전자랜드21의 신문광고나 전단지 내용을 보면 이같은 흐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과거의 세일개념 대신 「정상판매가격」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마케팅 방법상으로는 할인판매 대신 「경품증정」 「끼워팔기」가 주류를 이뤘다. 할인보다 덤을 주는 방법으로 바뀐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오픈프라이스제의 핵심인 권장소비자가격제 폐지는 소비자들에게 큰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전자제품을 구입할 때 비싼지 싼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픈프라이스 대상 품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판매가격을 표시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일고 있다. 이는 소비자들이 「적정가격」과는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제도 시행이후 소비자 구매패턴도 크게 달라졌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소비자들이 대폭 늘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통해 전자제품 가격정보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소비자들도 전자제품을 구매하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미리 가격을 알아보는 것이다.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각종 전자제품을 가장 싸게 판매하는 유통점에 관한 정보 즉, 최저가 정보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에누리(대표 서홍철 http://www.enuri.com)의 경우 오픈프라이스제 시행 이후 방문자가 급증해 최근에는 하루 2만명 접속에 30만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이 회사의 서홍철 사장은 『오픈프라이스는 소비자 측면에서 보면 가격에 대한 기준이 없음을 뜻하므로 가격정보 확보여부에 따라 소비자들은 싸게 사기도 하고 바가지를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영하기자 yh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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