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반도체라면 메모리가 전부인 것으로 여긴다. 업체도 삼성전자와 현대전자만 있는 줄 안다. 두 회사가 워낙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맹위를 떨치고 있어서다.
그렇지만 두 회사 말고도 국내에는 적잖은 반도체업체가 있다.
삼성·현대보다도 역사가 훨씬 긴 반도체소자 업체가 있는가 하면 이름만 놓고 보면 이게 반도체회사인지 석유회사인지 알쏭달쏭하나 국내 업체보다 훨씬 큰 외국 소자 및 장비업체들도 국내에 여럿 있다.
최근에는 30∼40대가 주축이 돼 창업한 반도체 설계업체도 있으나 이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메모리 위주의 국내 반도체산업 구조는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KEC(구 한국전자)와 아남반도체(구 아남산업)는 국내 반도체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회사들이다.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 다만 두 회사는 후발주자인 삼성·현대·LG 등에 비해 발전속도가 느려 국내에서 각광을 덜 받을 뿐이다.
아남반도체는 IMF체제 이후 워크아웃이라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렇지만 두 회사는 이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전자는 주력인 소신호형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전자부품 사업을, 아남반도체는 파운드리 사업을 승부수로 던졌다.
이 때문에 두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커진 권한만큼 책임 또한 무겁다.
KEC의 오너는 곽정소 회장(45)이다. 그는 지난 81년 선친 곽태석 회장의 뒤를 이어 경영을 맡았다. 유원영 고문(64) 아래서 경영수업을 받은 그는 지난 87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그런데 10년 만인 97년, 그는 당시 재계를 놀라게 하는 결정을 내렸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회장으로 자리를 물러난 것이다.
곽정소 회장은 평소 『오너는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공백을 메우거나 큰 흐름만 읽으면 된다』고 말해 왔는데 이를 전문경영인제의 도입으로 실천한 것이다. 실제로 경영에 거의 간섭하지 않고 있다.
곽 회장은 다만 선친과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사업가로서 얻은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으며 KEC가 소신호용 반도체부문에서 세계 제1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이같은 기대를 실현시킬 KEC의 사령탑이 바로 김충환 대표이사 사장(56)이다. 김 사장은 금성사 등을 거쳐 지난 81년 KEC에 합류해 16년 만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공대 출신이 즐비한 회사에서 보기 드문 상대 출신(서울대)으로 곽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수치위주의 경영으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도 받았으나 IMF 한파를 거치며 경영능력을 과시했다. 최근에는 회사명 변경과 디지털경영 선언 등 KEC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김 사장의 양팔은 빈용국 전무(반도체사업본부장, 55)와 서경석 전무(56)다. 한살 터울인 두 사람은 부사장제가 없는 KEC에서 각각 사업·기술담당 부사장 역할을 맡고 있다.
빈 전무는 기획에서 해외법인장까지 두루 거쳐 사업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으며 서 전무는 「아직도 기계 고치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KEC 엔지니어의 대부다.
이들 세 사람과 함께 영업본부장인 이인희 상무(50), 반도체공장장인 최순주 상무(48) 등의 임원이 KEC의 변화를 일으킬 기대주다.
아남반도체 역시 최근 변화를 모색중이며 그 선두에는 황인길 대표이사 부회장(60)이 있다.
이달초 아남반도체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황 부회장은 콜로라도대 교수 출신으로 지난 89년 부사장 겸 연구소장으로 아남반도체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직전까지 공장 담당 부회장을 맡아 웨이퍼 전문 수탁생산(파운드리)업체로 변신을 선언한 아남반도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적임자로 평가받는다.
알려진 대로 아남반도체는 최근 미국의 앰코테크놀로지(ATI)에 3개 패키징공장을 매각해 신설한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ATK)와 아남반도체로 나뉘었다.
ATK의 초대 사장은 김규현 전 아남반도체 대표이사 사장(51)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남산업에 입사해 사장까지 오른 「아남맨」이다.
재경·수출입·자재·기조실 등 관리분야에서 거치지 않은 부서가 없을 정도다. 그룹 기획조정실에 있으면서 그룹 오너인 김주진 회장(64)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두 회사는 두 전문경영인의 책임아래 운영되나 그룹 오너인 김주진 회장의 우산아래 있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김주진 회장은 지난 70년 아남반도체의 미국 판매법인인 앰코테크놀로지를 설립해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번에 위기에 처한 아남반도체의 공장을 인수해 ATK를 세웠다.
이번 인사는 실제로는 같은 회사이나 법적으로 엄연히 다른 ATK와 아남반도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횡인길 부회장을 뒷받침하는 인물로는 생산기획실 장기석 부사장(61), 경영지원실 김이환 부사장(58), 생산본부장 박광오 부사장(57) 등이 있다.
40대 후반이 주력인 다른 회사에 비해 연로해 진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이나 고정 고객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이 회사의 성격상 별 문제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동부전자는 반도체사업에 갓 뛰어들어 30년 안팎인 경쟁사와 뚜렷이 구별되는 신출내기 기업이다.
이 회사의 수장은 한신혁 사장(55)이다. 종합상사로 동부그룹에 발을 내디딘 한 사장은 동부그룹 종합조정실장을 거쳐 동부산업·동부텔레콤·동부정보기술 등의 대표이사를 두루 거친 김준기 회장의 핵심 측근이다.
3년전 반도체사업 진출을 직접 진두지휘했으며 이번에 비메모리사업으로 선회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신혁 사장은 김준기 회장의 새로운 관심사인 정보기술(IT)사업에 대한 두뇌 역할을 맡고 있다. 한 사장은 지난 97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참모는 경영철학이 필요없다. 지휘관의 분신이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제 그는 지휘관의 자리에 올랐다.
현대전자 전무 출신인 민위식 부사장(51)은 차분히 연구개발 전반을 이끌어가면서 치밀하면서도 공격적인 경영방식의 한신혁 사장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들 대기업과 다른 한편에서 반도체업계의 축을 이루는 회사들이 바로 주문형반도체(ASIC)업체들이다.
차근차근 승진하기보다는 모험을 좋아하는 이들은 삼성전자, 현대전자(구 LG반도체 포함) 등과 국책연구소 출신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90년대 초반 창업한 1세대와 후반에 창업한 2세대로 나뉜다.
1세대나 2세대나 30대 창업, 직장생활에 대한 염증 등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 다른 게 있다면 2세대 창업가 가운데는 잇따른 구조조정으로 대기업에 대한 기대를 접고 창업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1세대의 대표주자는 유영욱 서두인칩 겸 서두로직 사장(54)과 황기수 코라로직 사장(48)이 대표적이다.
유 사장은 전자통신연구원(ETRI) 미국소장, 황 사장은 현대전자 시스템IC사업본부장이라는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와 회사를 차렸다.
이들은 후배 창업가들에게 ASIC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준다.
40대 안팎인 2세대 ASIC업체들은 대체로 90년대 후반에 창업했다. 2000년대 국내 ASIC산업을 이끌어갈 기대주들이다.
서승모 씨앤에스테크놀로지 사장(41), 정자춘 아라리온 사장 겸 ADA 회장(40)이 업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김달수 TLI 사장(40),정태섭 이시티 사장(42), 이성민 엠텍비젼 사장(39)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삼성이나 LG반도체 출신으로 저마다 특화된 분야에서 쌓은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거친 황무지를 일궈 나가고 있다.
강경호 스페이스테크놀로지 사장(54)은 한라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출신으로 ASIC벤처에 뛰어든 이색적인 인물이다.
다국적 반도체업체의 지사장들도 국내 반도체산업의 한 축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사실 국내 반도체산업은 국내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인 35년전 미국의 코미, 페어차일드, 시그네틱스 등의 다국적기업 진출로 기지개를 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0달러 정도이던 시절이다.
국내 반도체산업은 이들 다국적기업에 대한 임가공사업으로 시작해 이제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강국이 됐다.
다국적기업은 단순히 과실만 따먹는 존재 이상인 것이다.
대표적인 지사장으로는 김덕중 페어차일드코리아 사장(48), 정용환 인텔코리아 고문(47)을 비롯해 김성우 한국퀄컴 사장(53), 손영석 텍사스인스트루먼츠코리아 사장(45), 은진혁 인텔코리아 사장(32), 주재량 AMD코리아 사장 등이 있다.
대부분 국내외 주요 반도체업체 출신으로 시야가 넓고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덕중 사장은 삼성전자 전력용 반도체사업부장으로 지난해 페어차일드에 사업을 매각하면서 지사장에 올랐다. 진대제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사장과도 절친한 친구 사이이며 국내 전력용 반도체분야의 권위자다.
LG전자 상무 출신인 김성우 사장은 정보기기 분야에 오랫동안 근무해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 주재량 사장은 페어차일드 출신으로 인텔코리아에 맞서 CPU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삼성전자에도 근무했던 손영석 사장은 지난해 전자산업발전 유공자로 표창을 받을 정도로 국내 반도체 산업에 공헌한 TI의 사령탑이다.
정용환 고문은 컨트롤데이타, 시게이트 등의 사장을 역임해 국내 정보산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다.
은진혁 신임 사장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세계 1위 반도체업체의 한국지사장을 맡아 화제를 모으고 있으며 국내 반도체업계의 세대교체를 예고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김인구기자 cl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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