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회-KEC

반도체 빅딜과 인터넷 벤처기업 열풍으로 온 전자업계가 들썩이던 지난해 KEC(구 한국전자, 대표 김충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제 갈길만 갔다.

대형 반도체업체의 구조조정과 빅딜이 이뤄지기 전에 이미 사업구조를 수익사업 위주로 전환해 실속을 차렸다. 인터넷을 비롯한 벤처기업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나 KEC는 이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변화에 둔감한 회사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 회사는 IMF체제 동안 연속 흑자를 기록했으며 지난해에는 매출 26%, 순이익 288% 증가라는 좋은 성적표를 냈다.

남의 돈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투자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재무구조도 안정됐다.

위험관리 경영의 모범사례로 손꼽을 만하다.

KEC는 인터넷과 디지털에 대한 관심이 잠시 멈칫거리는 요즘 오히려 이에 대한 강한 드라이브를 건다. 디지털시대에 걸맞게 회사이름까지 바꿨다.

그렇다고 이 회사가 다른 대기업처럼 인터넷과 디지털 사업에 몸을 담거나 투자해 돈을 벌겠다는 것은 아니다. 기존 반도체와 핵심부품 사업을 더욱 다져놓기 위해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가 최근 여러 IMT2000컨소시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제휴의 손짓을 애써 뿌리치는 것도 이러한 전략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 KEC는 IMT2000 대응 핵심부품을 개발하고 공급하는 데 주력해야지 서비스쪽에 한눈을 팔아서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판단이다.

KEC의 느린 「황소걸음」은 전사적자원관리(ERP) 구축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ERP는 사내 각종 정보를 통합처리하는 정보시스템. 많은 국내 기업들은 그 필요성 때문에 단기간에 ERP를 구축하려 드나 KEC는 신중하게 자사에 가장 적합한 ERP 솔루션을 선정해 차근차근 시스템화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0월 ERP추진팀을 구성해 5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솔루션 제공업체를 선정했다. 구축기간도 평균치를 넘는 3년간의 작업으로 2003년 상반기까지 단계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우선 4개국 7개 생산거점과 10개국 14개 판매거점을 연결하는 통합정보망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무·생산·영업·조달 등 핵심 업무의 프로세스를 혁신할 계획이다.

특히 인터넷에 기반한 공급망관리(SCM)체제를 구축해 거래처에 대한 정확한 납기예측에 따른 실시간 공급체제를 구축, 생산성을 극대화할 방침이다.

우선순위에 따라 가장 필요한 것부터 도입해 구축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KEC는 정보시스템의 본격 구축에 앞서 조직부터 바꿔 나가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이라도 이를 수용할 만한 조직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때문에 이 회사는 일찌감치 과장·부장과 같은 직책을 없앴다. 그 대신 그룹이라는 소조직 형태로 바꿔놓아 언제든지 일부 조직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했다.

내부조직뿐만 아니다. 국내외 거래처와의 네트워크 역시 진전된 형태로 바꿔 나가고 있다. 급변하는 디지털 경영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자는 전략이다.

또 이 회사는 일찌감치 최고정보책임자(CIO)제도를 도입, 변화에 보수적이라는 평판이 실제로는 잘못 알려진 것임을 보여준다.

김충환 KEC 사장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기업들은 시설투자 못지 않게 대고객 서비스와 협력 및 거래처와의 네트워크에 대한 투자가 중요해졌다』며 『진정한 디지털기업은 이러한 환경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기업』이라고 말했다.

KEC가 인터넷과 디지털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어떻게 대응할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많은 기업들이 디지털기업으로의 변신을 선언하는 요즘 KEC는 이러한 구호보다 실질적인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이 회사의 올해 경영방침은 6시그마로 대표되는 품질경영체제의 확립과 인터넷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다.

반도체업체들이 초호황에 들떠 있으나 이 회사는 매출과 이익률의 두자릿수 성장만을 목표로 한다.

매출보다는 기술과 수익 중심의 경영을 전개하기로 하고 매출액의 10% 이상을 지속적으로 투자할 방침이다.

또 주력인 소신호용 개별 반도체와 표면실장형 디바이스는 물론 멀티미디어 및 이동기기용 부품, 적외선열상 및 실리콘 센서 등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에 주력해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할 계획이다.

이러한 집중화 전략에 따라 이 회사는 그동안 자사 이름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 톡톡히 구실을 했던 전자악기 등의 전자사업도 떼어냈다.

KEC는 2005년께 매출 1조원대에 오르고 이익률도 20%에 이르는 초우량 전자부품회사로 발돋움하면 저절로 디지털시대의 강자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디지털기업은 요란한 구호보다는 철저히 준비하는 기업의 몫」이라는 말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KEC라는 회사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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