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호 지음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김소월」
「그립다 / 말을 할까 / 하니 그리워 / 그냥 갈까 / 그래도 / 다시 한번 더…」(가는 길)
10대 시절을 보내면서 소월의 시 한 구절 외워보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어디 그뿐이겠는가.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님에게)라며 밤을 새우던 일기장을 금방금방 써내려 가던 기억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학창시절 그렇게 애달프던 소월은 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누군가 그런 짜안함이 거기에 있노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다. 소월은 어느 날 방을 정리하다가 다가왔거나, 아버지 때부터 큰누나 때부터 쌓아둔 골방의 헌책더미 속에서 문득 나타나곤 했을 것이다. 표지는 반쯤 헐고 헌 삽에 녹슬 듯 벌겋게 탈색된 속지는 몇 장쯤 떨어져 나간 채로… 그리고 너무나 젊어서 달뜬 꿈에 열병을 앓던 풋내기들의 마음 속을 온통 헤집고 다니지 않았던가!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 해가 산마루에 올라와도 /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밝은 아침이라고 할 것입니다」(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그런 소월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고 사회 초년병이 됐을 때까지도 한동안 우리들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곤 했다.
꽃피던 봄이면 우리의 가슴 속에 꼭꼭 숨어들곤 하던 소월. 이 무더운 여름날에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노량진 학원골목의 한 서점에서 소월을 만난 것은 정말이지 20여년 만의 일이었다. 한 여학생의 손에 접혀져 있던 소월은 「비가 온다 / 오누나/ 오는 비는 /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로 시작되는 「왕십리」였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그 여학생은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 창가에 아롱아롱 / 달이 비친다」의 「원앙침」에 이르기까지 10여편의 소월을 숫제 노트에 베껴대고 있었다.
『뭐 이렇게 촌스런 시가 다 있어요? 국어 선생님이 맘에 드는 시 10편씩 적어 오라고 하셨는데요, 소월이 맘에 들어서였다기보다는 시의 길이가 짧아 빨리 베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소월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보라고 했더니 여학생은 주저할 틈도 없이 이내 외우고 있던 수학의 공식처럼 달달거렸다.
『소월시의 특징으로는요, 첫째 민요적 운율, 둘째 한과 슬픔, 셋째 향토적인 정서, 넷째 상실감의 승화라고 할 수 있어요. 대표적인 시는 「진달래 꽃」인데요, 고려가요 「가시리」 「서경별곡」과 전통적인 맥이 닿아 있대요!』
그랬다. 학생들에게 소월은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읽혀 오고 있었다. 학교에서 달달 외우던 소월과 구석방이나 오래된 책 더미 속에서 만나던 소월이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학교에서 만나던 소월이 다가서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면 구석방에서 만나던 소월은 서투른 몸짓의 젊은 날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을 터다.
노량진의 서점에서 필자는 물경 세번째 세계에서의 소월을 만났다. 거기에는 옥녀봉 냉천터(소월의 본가가 있던 정주군 곽산면 소재)에서 만나던 첫사랑 오순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한 시인이 있었다. 그리고 시인의 혈관 속으로는 조용한 인정과 달뜨지 않는 꿈과 맑디맑은 순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오산학교 젊은 시절에 썼던 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풀따기」다.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져요」
<논설위원 jsu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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