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진출<14>
아침에 일어나 창문의 커튼을 여니 눈앞에 높이 솟은 건물이 보였다. 별로 높은 건물이 없는 라사에서 유독 높이 솟은 그 건물은 포달랍궁이었다. 우리는 호텔 식당에 내려가 토스트와 계란부침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로비로 나갔다. 어제 공항에 나왔던 여행사 남녀 한쌍이 다시 그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간 곳은 호텔 창에서 보았던 포달랍궁이었다. 이 궁전은 수직 베르사유라고도 불리는데, 폭이 400m이고, 탑이 117m라고 하였다. 내부는 13층으로 성곽, 예배당, 달라이 라마의 거실과 침실, 사무실 등이 있다. 방은 수백개에 이른다. 각 방에는 금과 은장식, 청동 집기, 각종 보석류와 도자기, 크기가 각기 다른 20만개의 불상이 있고, 극채색의 벽화가 있다. 그곳을 나와서 인민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팔각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토산품을 팔았다. 나는 민예품 가게에 들려서 구경을 했지만, 모두 조잡해 보여서 사고 싶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팔각가 중심거리에 있는 대소사(大昭寺)라는 절에 들렀는데, 이곳은 티베트 왕조를 세운 송첸, 감포왕이 문성공주가 가져온 석가모니불을 모시기 위해 지은 절이었다. 우리는 18세기 달라이 라마 7세가 만들고 그 후에 달라이 라마들의 피서지로 이용되었다는 인민공원 안의 노르브링카에 들렀다. 이곳은 지금 시민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나는 공산국가였던 러시아에서 잠시 머문 일이 있는데, 그곳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과거 종교적인 성지가 거의 대부분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원이 아니면 박물관이 되었던 것이다. 공산 국가의 가치관으로 종교가 중요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공원으로라도 보존을 한 것을 고맙게 여길 판이다.
라사에는 라마교의 본거지답게 유적이라고 하면 대부분이 절이었다. 라사에서 북쪽으로 이십리 정도 가면 색랍사라고 있는데, 불교대학이었던 곳이었다. 불교대학으로 가장 컸던 곳은 북서쪽으로 삼십리 가면 있는 철봉사였다. 바위산 비탈에 세워진 이 웅대한 절은 약 6000명에서 1만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공부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8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
내가 티베트를 방문한 것은 절을 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상반된 가치관을 찾기 위해서였다. 가장 극심한 독립운동을 하는 관계로 한때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했던 곳이었다. 지금도 여행사의 보증없이는 개인의 여행은 자유스럽지 못했다. 라사에는 한족이 가장 많아서 중국의 다른 중소도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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