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세계가 영어만이 통하는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터넷 보급이 확대될수록 영어 태풍은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더욱이 이런 추세가 적어도 50년은 더 지속될 것이라는데 이견을 낼 사람도 별로 없을 듯하다.
인터넷 페이지의 빗장격인 도메인만이라도 자국어로, 그러니까 한글로 등록하자는 주장은 그래서 나름대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금까지 있었던 여느 한글화 관련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기술적 특성의 이해를 전제로 한 진정한 한글사랑이나 내셔널리즘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해방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한글의 과학성을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은 세대다. 여기에서는 정치적 의도였던 순수한 민족적 발로였던간에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과학적인 언어였다. 한글세대들의 이런 자부심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60년대말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컴퓨터에 의해서였다.
가장 과학적이라는 한글이었지만 컴퓨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애당초 영문 알파벳 처리 기반으로 설계된 컴퓨터가 초·중·종성의 조음을 바탕으로 하는 한글과 쉽게 어울릴 리가 만무했다.
컴퓨터의 한글화문제는 지난 30여년동안 한시도 시름이 걷히지 않았던 화두 그자체였다. 컴퓨터가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던 시대를 지나 사회·문화·경제 모든 것을 장악해버린 오늘날에는 국민 모두의 논쟁거리가 됐다.
논쟁중에는 다행히도 조합형과 완성형이 대립하는 식의 기술적 문제도 있었지만 한글세대의 자부심을 자극하여 원치않는 방향으로 흘러버린 사례가 더 많았다. 문제는 바로 후자다.
「왜 한글화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이나 이해가 생략된 채 당위성만 강조되는 것이 그 속성이다. 한글화를 통해 그 효용성이 증대되는 경우와 오히려 감소시키는 경우에 대한 수를 판단하는 과정도 생략된다. 그러다보면 논쟁은 엄청난 대중적 전염성을 바탕으로 어느새 컴퓨터에 대한 한글화가 아니라 영어에 대한 대응논리로 바뀐다. 그 결론이 미국기업이나 영어에 대한 거부감으로 귀착되는 것도 예정된 수순이었다.
한글화가 내포한 이같은 화인성(火因性)을 상업적으로 가장 잘 이용하는 곳은 역시 기업이다. 기업들은 때때로 정부기관까지를 움직여 그 상업성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상업성은 급조된 여론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지난 91년 몇몇 기업이 추진했다가 실패한 한글명령어 운용체계 K-DOS개발 사건은 그 단적인 사례다.
기업들은 당시 영문으로 된 MS-DOS의 부당성과 반 마이크로소프트 정서를 부추긴 다음 정부로부터 관급 약속까지 받아냈지만 K-DOS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K-DOS는 주요 컴퓨터·주변기기·소프트웨어 회사들의 지원(호환성)을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기술적인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데에 있었다. DOS의 쓰임새에서 명령어가 한글이든 영문이든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점, 또한 컴퓨터메커니즘 상에서는 한글명령어 자체가 오히려 불편하다는 점 등이 그것이었다.
지난 97년 외국회사에 인수되기 직전 수십만 「아래아한글」사용자들의 십시일반으로 구사일생한 한글과컴퓨터가 지금에 와서는 한글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이 아닌 인터넷 전문회사로 변신한 것도 아이러니다. 이같은 변신을 미리 알았더라면 사용자들은 그같은 성원은 보내지 않았을 터이다.
최근의 인터넷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80% 이상이 도메인의 한글화가 인터넷 대중화에 바람직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메인 한글화는 생각보다 많은 번거로움과 비용 그리고 노력을 전제로 한다. 영문 도메인을 따로 등록해야하고 시스템내부에서도 두 도메인을 동일시하도록 해주는 복잡하고 치밀한 처리 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글도메인화를 바람직하다고 한 응답자들은 결과적으로 이같은 번거로움보다는 10자 내외의 영문도메인을 외워 입력하는 것이 더 수고롭다고 느낀 사람들인 셈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인터넷대중화에 도움이 된다면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응답자들이 과연 여기까지를 고려해보고 그런 답을 했을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는 것일까. 한글도메인화에 관심과 함께 시중에는 벌써부터 한글도메인을 분양하거나 등록을 대행해준다는 기업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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