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불과 보름 정도 앞둔 지난해 12월 중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다짐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열린 「새천년을 여는 과학기술인대회」.
대통령 주재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총리는 물론 과학기술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등 정부관계자들과 연구회 이사장, 출연연 기관장 등 과학기술인들이 참석해 과학기술입국 의지를 다졌다.
3일 후 서울민사지방법원은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발전협의회가 제기한 정년하향조정 효력가처분신청을 이유있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정부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출연연 구조조정작업이 벽에 부딪힌 순간이었다. 당연히 예산당국과 총리실로부터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KIST측은 이로 인해 정년제 도입이 미수에 그친 게 화근이 돼 현재 예산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정부출연금을 삭감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생색낼 자리에만 주인이 있지 출연연을 감독하는 주인이 따로 없다.
출연연의 법적 주인은 총리실.
정확히 말해 국무조정실장의 소관업무고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기술에 문외한인 사무관 한두 사람이 예산업무는 제쳐두고 일반업무를 담당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60% 이상을 쓰고 있는 출연연의 문제가 무엇이고 구조조정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턱이 없다.
그러나 출연연의 실제 주인은 과기부로 총리실을 통해 지원받는 경상비를 제외하고는 최대 80% 이상의 나머지 예산을 사실상 과기부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출연연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기획예산처.
막강한 예산권을 배경으로 출연연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지난해 출연연이 강도높게 진행한 구조조정작업도 명목상 총리실 소관으로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기획예산처에 의해 진행됐다.
그러다보니 대덕연구단지를 비롯, 총리실로 소속을 옮긴 대부분의 출연연들이 자신들을 챙겨주는 연구회나 총리실보다는 기획예산처나 과기부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예산은 기획예산처가, 일반행정은 총리실이, 연구과제 발주는 과기부에 의존해야 하니 머리와 팔다리가 따로 놀 수밖에 없다.
『뚜렷이 챙겨주는 곳이 없는데 정부의 경영혁신 지침대로 연구소를 운영하기가 쉬우냐. 연봉제를 도입하라는데 퇴직금 줄 돈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연구원들의 반발을 무마할 만한 선물도 없고, 각 출연연이 분할지급 등을 대안을 내놓았지만 연구원들의 불만은 여전하다.』(기초과학연 K과장)
그는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지침만 있고 책임지는 실체가 없는 상황에서 출연연 연구원들이 동요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지난해 출연연 재편과정에서 과기부 산하기관으로 살아남은 원자력연·원자력안전기술원 등 8개 기관은 구조조정 실적저조에 따라 문책성 예산삭감 등의 불이익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구조조정의 태풍에서 비켜섰다.
주인없이 진행됐던 구조조정의 대표적인 폐해는 출연연의 기형적인 인력구조.
『90년에 출연연에 들어왔지만 IMF 이전에는 자진 퇴사직원을 거의 보지 못했다. 지난해 구조조정 또한 하위기능직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인사적체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항우연 P박사) 정부의 지침에 따라 외형적인 숫자맞추기에 급급하다보니 나타난 결과다.
따라서 인사적체에 시달리지 않고 있는 출연연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실제 지난해 구조조정 결과 과학재단·연구개발정보센터·표준과학연·생명공학연 등 출연연구기관 대부분의 상위보직자 그룹이 전체의 15∼20%에 이르고 있고 일부 출연연에서는 최근 선임급 연구원 100여명을 불가피하게 무더기 승진시켜 실무급 연구원이 없는 실정이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했다지만 헛했다는 결론이다.
연구원들도 기댈 곳 없기는 마찬가지.
『프로젝트 진행중 소속이 연합이사회로 바뀐 이후 3년짜리 과제가 중지돼 갑작스레 다른 과제를 수주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더욱이 일부는 프로젝트와 예산 규모가 너무 작아 7개까지 과제를 붙들고 있는 소위 보따리 연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KIST L박사)
출연연 연구원들은 연구과제중심운영제(PBS)의 헛점과 출연연을 이끌 주인이 없다보니 운영의 타율성이 연구원들이 보따리 연구를 할 수밖에 없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출연연의 실체없는 주인들의 목소리는 다르다.
국무조정실측은 지난해 출연연 구조조정 조사결과를 통해 연구회 체제의 도입이 일단 연구기관에 자율권을 보장하는 데 성과를 보였다고 자평하고 있다.
반면 출연연의 입장은 다르다.
말로만 인사·예산권을 주었지만 정작 연구소의 핵심이 되는 연구사업에 관해서는 자율권이 거의 없다는 주장이다.
실체없는 주인들이 연구비를 배분하며 기관고유사업 등 연구프로젝트와 책임자 선정을 직접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연연 기관장 출신인 K박사는 『연구소의 정원이라든가 인사·예산에 관한 사항은 기관장에게 일임하도록 법률에 정해져 있어 상당부분 자율과 독립성이 보장돼 있는 것처럼 보이나 연구소 운영의 핵심이 되는 연구사업의 경우 소신대로 기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자율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하고 『현 제도 아래서는 연구기관의 자율적인 목표관리는 물론 엄밀한 의미의 책임경영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국내 실정을 무시한 PBS의 개선이 급선무』라며 『현행 연구비 배분방식도 연구프로젝트의 선정과 연구책임자의 선정을 정부부처가 직접 관장토록 하고 있어 기관장의 의사반영이 완전히 배제돼 주인은 없는데 정부부처의 간섭은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학기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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