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 논설실장 hdlee@etnews.co.kr
언행일치는 우리 조상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실천덕목이었다. 조상들은 대장부의 말 한마디는 천금 무게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말에 신중을 기했다. 그대신 한번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책임을 졌다. 말과 행동이 같지 못하면 가문의 큰 수치로 간주했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어떤가. 한마디로 신뢰가 실종된 시대라고 할 정도다. 흔히 정보사회를 신용사회라고 말한다. 이는 제품의 주문과 판매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사이버상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초반이면 전세계 교역량의 30% 이상이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같은 사이버 거래는 믿음을 전제로 한 행위다. 그런 면에서 정보사회의 실천덕목의 하나로 신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새 천년을 20여일 앞둔 지금 세상은 그와는 정반대 모습이다. 불신의 벽이 갈수록 높아져 상대가 하는 말에 대해 믿음을 갖기 어렵다.
과거에는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의 말 믿고 그대로 하다가는 집안을 풍비박산 내기 십상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IMF사태 이후 금융기관의 신용불량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지난 7월말 현재 적색거래자 31만명을 포함해 연체·요주의 거래자가 248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남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고 재산을 하루 아침에 날린 사람도 상당수 된다고 하니 믿음에 대한 보상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묻지마 투자」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코스닥시장에서도 불성실 공시가 많았다. 올들어 지난 11월말까지 전체 397개 기업 가운데 108개 기업의 공시가 불성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본 투자가들은 어디가서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할지 실로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실종된 정치개혁과 공기업 구조조정, 정부 정책의 혼선, 이율배반적인 공약, 게다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아침 저녁으로 말을 바꾸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불신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겨울철 내린 눈은 쌓였다가 날씨가 풀리면 녹지만 불신은 갈수록 그 두께가 두터워진다. 믿음을 잃은 개인이나 기업가·정치인은 21세기 디지털시대에 살아남기 어렵다. 신뢰를 잃으면 실시간 정보가 유통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이 불가능해 퇴출당해야 한다. 신뢰의 실종은 도덕성을 훼손하고 그로 인한 사회붕괴 현상은 국가적인 손해다. 신뢰는 누구에게나 무형의 자산이다. 반대로 불신은 악성 채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 반체제 활동을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피시아스와 그의 친구 사이에 얽힌 일은 우리에게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피시아스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사흘 동안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간다. 그를 대신해 친구인 데이븐이 감옥에 갇혔다. 휴가가 끝나도 피시아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피시아스에 대한 데이븐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 친구는 꼭 올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사형집행 시각이 되자 데이븐이 단두대로 올라갔다. 막 사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피시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장마가 들어 길을 돌아 오느라고 늦었다며 단두대로 올라간 피시아스는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껴안았다. 이를 본 로마황제는 크게 감명을 받아 그를 용서했다는 내용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때도 불신이 극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나라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백성들은 믿지 않았다. 재상이던 상앙은 백성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고민하다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18척 높이의 장대를 남문 앞에 세워놓고 방을 크게 써 붙였다. 『이 장대를 동문으로 옮기면 큰 상금을 주겠노라.』 그러나 백성들은 코방귀를 뀌면서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이를 본 상앙은 상금을 크게 올렸다. 그러자 직업이 없는 한 술주정뱅이가 속는 셈치고 장대를 동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이를 보고 약속한 대로 상금을 지급했다. 이후부터 백성들은 나라에서 하는 말을 믿고 따랐다는 것이다.
새 천년을 앞두고 우리는 먼길을 가야 한다. 그 길목에서 정보화를 가로막는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자가 자신의 마음 속에 상앙의 장대를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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