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국산 컴퓨터
컴퓨터분야의 본격적인 국산화 작업은 72년에 시작된 이른바 「메모콜(Memo Call)」 프로젝트의 추진이 그 효시로 알려져 있다. 「메모콜」 프로젝트란 청와대와 전국 주요기관 및 정보기관간 핫라인 전화를 설치하는 일종의 극비 개발계획. 이 프로젝트를 통해 국산 1호 컴퓨터 「세종1호」가 탄생한 것이다. 67년 경제기획원에서 국내 최초의 컴퓨터인 「IBM 1401」을 도입해 운용한 지 5년여만의 일이다.
「세종1호」에 앞서 컴퓨터 국산화 노력을 시도한 사람 가운데는 60년대 초반 한양대 교수였던 30대의 이만영(한양대 명예교수)을 빼놓을 수 없다. 64년 5월 15일자 한양대학보는 이만영을 「한국최초의 전자계산기 완성」의 주인공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이만영은 62년부터 64년까지 『연립대수식, 고계의 선형·비선형 미분 방정식, 편미분 방정식의 해답을 자동으로 계산할 수 있어 어떤 물체의 움직이는 진동상태를 재는 것부터 자동제어계·항공역학계·통신계·음향계 등 다방면에 걸쳐 그 활용이 기대되는 3종의 전자관식 계산기』를 개발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만영의 전자관식 계산기는 결정적인 흠이 하나 있었다. 이만영의 그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던 스페리랜드의 「유니백」시리즈나 IBM의 「70xx」시리즈, 「14xx」 등과 달리 장래성과 실용성이 불투명한 아날로그식 컴퓨터였다. 컴퓨터라기보다는 고차원 수학문제를 푸는 일종의 계산기 정도였다. 이런 한계 때문에 이만영의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는 발표되고 얼마 안있어 대학박물관에 모셔지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세종1호」에 앞선 또 다른 국산화 결과로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70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산실장 성기수가 주도한 컴퓨터 한글화가 있다. 성기수의 한글화는 라인프린터에 걸린 영자 체인(chain)을 한글 체인으로 교체해 한글을 출력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영문 알파벳에 대응하는 한글의 초·중·종성 자모들을 컴퓨터 명령으로 모아 출력하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긴 했다. 하지만 당시까지 컴퓨터 국산화는 물론 한글화는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미개척 분야여서 성기수가 이룬 컴퓨터 한글화는 당시로서 매우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73년 2월 메모콜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한 「세종1호」는 당시 미니급 컴퓨터가 지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능을 지원하면서도 컴퓨터의 두 요소 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세종1호」의 개발은 그러나 처음부터 컴퓨터를 국산화하려는 계획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1호」의 개발과정은 메모콜 프로젝트를 시작한 72년에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등 긴박했던 국내외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흥미롭다. 그러나 「세종1호」는 또한 지금은 삼성전자에 흡수합병된 삼성반도체통신의 출범에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는 등 산업적 측면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세종1호」 개발을 위한 메모콜 프로젝트는 72년 4월 당시 청와대 통신기술처장이던 한 인사가 KIST 부소장 정만영(통신시스템연구조합 이사장)에게 전화를 하면서 시작됐다. 통신기술처장은 이 전화에서 정만영에게 다음과 같은 기술적 검토와 제품개발 가능성을 타진해왔다.
「청와대와 주요기관간 전화 통화 내용에 대해 미국 등 외국의 정보기관이나 기타 외부로부터의 도청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주요 요인들과 신속하게 통화할 수 있으며 통화 도중이라도 언제나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상태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개발비 6000만원 정도의 핫라인용 사설전자교환기(PABX)」
여기서 정보기관이란 한국측은 중앙정보부였고, 외국측은 당시 대통령 밀사로서 평양을 비밀리에 오고 가던 이후락 정보부장의 동태를 파악하려던 미국의 CIA와 소련의 KGB를 뜻했다. KIST는 곧바로 안병성(ETRI 안병성연구실 실장)이 실장으로 있는 방식기기실을 중심으로 연구팀을 만들었다. 2개월 동안의 조사끝에 연구팀은 청와대가 요구한 PABX가 CIA나 KGB 등에서도 극히 일부 고급기관에서만 사용되는 시분할식 특수목적용 교환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때 시분할 교환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전전자식 교환기가 보편화된 오늘날과는 달리 기계식자동교환기인 EMD에 시분할 제어용 컴퓨터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는 금성사가 독일 지멘스사의 기술제휴로 EMD방식의 기계식자동교환기를 생산하고 있었지만 이같은 특수목적용 교환기를 직접 개발할 정도의 기술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수백명의 고급연구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KIST도 마찬가지였다. 궁리끝에 연구팀은 당시 미니컴퓨터 열풍을 주도하던 디지털이퀴프먼트사(DEC)의 「PDP11」이나 데이터제너럴(DG)의 「노바 01」 정도의 컴퓨터를 제어용으로 활용한다면 청와대가 요구한 특수목적용 교환기 사양을 못맞출 것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판단에 따라 KIST측은 안병성을 팀장으로 하고 하드웨어의 디지털 부문에 여재흥(한화전자 고문), 아날로그 부문에 이주형(삼성전자 고문), 소프트웨어 부문에 천유식(ETRI 연구위원)을 각 부문 개발책임자로 하는 전자교환시스템개발팀을 구성하고 청와대측과 메모콜 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했다. 프로젝트 내용은 기계식교환기를 전자식으로 제어하는 컴퓨터시스템의 개발이었다. 개발팀은 즉시 청와대의 협조를 얻어 제어용 컴퓨터로 미국 DG가 일본에서 생산중이던 미니컴퓨터 「노바 01」 3대를 들여왔다. 개발할 전자교환기시스템의 구체적인 사양들이 설계되고 이를 지원할 소프트웨어 개발이 시작됐다.
여러번의 시행착오끝에 청와대가 요구한 주요 7가지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전자교환시스템용 소프트웨어가 「노바 01」환경에서 개발됐다. 이 소프트웨어는 송신자번호뿐만 아니라 발신자번호로도 전화를 걸 수 있는 기능, 통화 우선권을 가진 상급통화자가 하위통화자의 회선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 상위권자가 하위권자에 의해 불필요하게 호출되는 상황을 차단하는 기능, 최우선권 상위통화자가 전국 어디서나 50명까지 동시 호출해 음성회의를 할 수 있는 기능, 단축 다이얼 기능 등 기계식교환기의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러 기능들이 들어 있었다. 요즘의 전전자식교환기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여러 기술적 측면을 고려할 때 최첨단 소프트웨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를 모두 개발하자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노바 01」 컴퓨터가 소프트웨어의 핵심인 시분할기능을 지원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자교환기는 소프트웨어 명령에 따라 데이터를 생성하는 중앙스위치와 모뎀에 접속된 지방 스위치장치를 시분할 방식에 의해 실시간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제어 역할을 맡게 될 「노바 01」이 하드웨어적으로 이를 지원하지 못했던 것이다.
개발팀은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한 끝에 시분할 기능을 지원할 수 있는 「노바 01」 호환 컴퓨터를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세종1호」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개발이 시작됐다. 전자교환기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하드웨어 기술이 전혀 없었던 전자교환시스템개발팀은 「노바 01」을 역분석(Reverse Engineering)함으로써 하드웨어 구조를 알아냈다.
개발 3개월여만에 새로운 컴퓨터 즉 「세종1호」가 완성됐다. 그러니까 「세종1호」는 「노바 01」을 복제하고 거기에 전자교환기가 요구하는 시분할 제어기능이 추가된 것에 불과했다. 처리용량도 12kW(킬로워드)로 표준 사양의 「노바 01」 기종과 같았고 명령코드와 주소로 구성되는 인스트럭션 구조도 같았다. 그러나 「세종1호」는 당시 미국 인텔사가 개발해 화제가 된 1KB짜리 D램을 주기억장치로 채택함으로써 처리속도를 크게 개선하는 성과를 거뒀다. 기술을 모방했지만 설계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이룬 셈이었다.
「세종1호」를 완성하자 개발팀은 청와대측과의 약속대로 73년 3월까지 240회선 용량의 특수목적용 사설전자교환시스템을 무난하게 개발할 수 있었다. KIST측은 「세종1호」가 연결된 이 전자교환시스템을 「K1STCCSS」라고 명명하고 청와대에 납품일자를 고지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약속과 달리 「K1STCCSS」의 신뢰성과 보안성에 문제점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일방적으로 KIST측과의 계약파기를 선언했다. 6000만원의 개발비는 「KISTCCSS」의 상용화를 통해 보전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KISTCCSS」를 상품화하겠다고 나선 곳이 미국의 통신기기 제조회사 GTE였다. KIST는 GTE로부터 50만달러를 받고 2년 뒤인 75년 초 「KISTCCSS」를 개선보완한 상용 사설전자교환시스템 「KIST 500」을 발표했다.
「세종1호」의 모습과 개발배경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사실 「KIST 500」이 널리 공급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GTE는 이어 77년 2월 「세종1호」를 포함한 「KIST 500」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삼성GTE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GTE는 그러나 80년 우여곡절끝에 삼성GTE의 지분을 철수하고 삼성은 비슷한 시기에 인수한 한국전자통신에 삼성GTE를 합병해 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출범한다.
「KIST 500」은 두 회사를 거치면서 「GTK 500」 「센티넬500」 등으로 개량되면서 86년 삼성·현대·대우·동양전자통신 등 전자교환기 4사의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 개발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세종1호」 역시 80년대 중후반 삼성반도체통신이 국내 처음으로 독자모델로 개발한 「삼성 슈퍼마이크로」시리즈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많이 본 뉴스
-
1
5년 전 업비트서 580억 암호화폐 탈취…경찰 “북한 해킹조직 소행”
-
2
LG이노텍, 고대호 전무 등 임원 6명 인사…“사업 경쟁력 강화”
-
3
AI돌봄로봇 '효돌', 벤처창업혁신조달상품 선정...조달청 벤처나라 입점
-
4
롯데렌탈 “지분 매각 제안받았으나, 결정된 바 없다”
-
5
'아이폰 중 가장 얇은' 아이폰17 에어, 구매 시 고려해야 할 3가지 사항은?
-
6
美-中, “핵무기 사용 결정, AI 아닌 인간이 내려야”
-
7
스마트폰 폼팩터 다시 진화…삼성, 내년 두 번 접는 폴더블폰 출시
-
8
삼성메디슨, 2년 연속 최대 매출 가시화…AI기업 도약 속도
-
9
美 한인갱단, '소녀상 모욕' 소말리 응징 예고...“미국 올 생각 접어”
-
10
국내 SW산업 44조원으로 성장했지만…해외진출 기업은 3%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