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 벤처캐피탈 인프라

이양동 LG인터넷 사장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고속도로 인프라의 규모와 그 효율성에 감탄하게 된다. 고어 부통령의 선친이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미국의 이러한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 투자를 주도했다고 하니 고어 부통령이 정보산업의 기본 인프라로서 초고속 통신망의 구축을 주장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정보기술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과연 이런 물리적 인프라만으로 충분한 것인지 또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고속도로 못지않게 교통법규가 어떻게 규정돼 있고 이를 집행하는 경찰이나 보험기관이 어떻게 활동하느냐가 중요하듯 시스템의 운영과 관련된 당사자들이 어떤 「룰」에 의해 움직이는가 하는 「소프트」한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최근 정보기술산업의 경쟁력이 벤처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우수한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한 국가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튼튼한 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벤처기업이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주고 원활히 투자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 못지않게 게임의 룰을 만들어 주고 이해당사자 간의 조정과 균형을 가능케 하는 소프트한 인프라를 갖추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벤처 캐피털」 회사들이 벤처기업과 기관투자자, 증권시장의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 더욱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벤처 캐피털은 성숙한 기업보다는 벤처기업의 탄생기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기관투자자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차이는 금융자산의 운영을 본업으로 하는 기관투자자와 벤처기업 또는 기업가의 중간에서 자금과 아이디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게임의 룰」을 만들고 이를 시행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어떤 벤처기업가인지, 어떤 기술과 아이디어에 벤처자금이 투자돼야 하는지, 이러한 투자가 어떤 방식으로 집행되고 어떻게 평가돼야 하는지, 누구에게 어느 정도의 인센티브가 제공돼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을 만들고 이러한 규칙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시행될 수 있게 함으로써 전체적인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벤처 캐피털이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업의 내용·기술·경쟁구도·산업전망 등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과 안목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특정한 벤처기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일시에 투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번의 단계에 걸쳐서 투자가 이뤄진다는 점도 중요하다. 단계마다 합의된 사업을 평가할 척도를 만들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투자를 중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투자자의 위험부담을 줄이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벤처기업에게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력과 경쟁을 벌이게 하는 규율(Discipline)을 가하게 하는 제도라는 점이 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는 그럴 듯한 아이디어나 선전으로 단기간에 일확천금을 올릴 수 없으며 사업의 본질에서 일탈하는 기업가는 즉시 투자가 중단되는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벤처기업의 경영과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벤처 캐피털이 직접 벤처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하거나 CEO를 선발하고 또는 벤처기업 간에 인수·합병을 유도하는 사례도 많다.

 실리콘밸리의 한 기업에 방문했을 때 회사 간판은 찾을 수가 없고 A4용지에 덜렁 회사 이름을 적어서 벽에 붙여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만큼 겉모습이 아닌 사업의 본질에 치열하게 집중, 게임의 룰을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는 것이 실리콘밸리의 핵심 경쟁력을 구성하는 「인프라」가 아닐까 한다.

 국내에서 경제회복과 함께 코스닥이 IMF체제 이전의 열기를 훨씬 뛰어넘을 만큼 활기를 띠어 과열 논란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체 주가와 함께 부분적인 조정(Correction)이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열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특히 인터넷 분야에서도 몇 개 벤처기업들이 상장돼 상상을 뛰어넘는 주가를 기록하고 있다.

 일전에 투자금융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의 반응은 국내 코스닥 시장이나 벤처기업들의 시장가치는 전문성을 가지고 벤처기업을 평가하고 육성할 수 있는 벤처 캐피털 회사들이 없다는 점 때문에 실제 주가보다도 더 낮게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임의 룰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시장은 언제든지 폭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특히 일부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벤처기업들이 몸집 부풀리기에만 힘을 쏟는 것을 놓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기업인들의 도덕성 문제로 해석돼서는 안된다.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운전자는 어디에나 있듯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은 어디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해 당사자들이 투명하고 공정한 룰 안에서 전체적인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인프라」를 얼마나 빨리 갖추는가 하는 것이다. 벤처기업의 육성에 있어서는 벤처 캐피털이 이런 측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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