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상 누구든지 말을 잘 듣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해야만 그 패권이 존속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편지로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벌써 현역의 신분으로 너무 많은 말을 한 기분입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 편지를 당신 오빠에게 보여주지 마십시오. 어쨌든,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이런 글이라도 끄적거리지 않으면 답답한 심경을 풀 수 없군요.
부언하자면, 그래도 나는 한국 사람이라 제럴드의 판단을 반박했습니다. 나의 사령관은 권력의 야욕이 있다기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부득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했을 것이고, 그는 그 일을 완수하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는 말은 옛날, 옛날이라고 해야 약 20년 전이지만, 박정희가 여러번 반복해서 했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군사혁명을 완수하면 자기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그 본연의 자세가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제럴드는 웃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세상의 역학구조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박정희가 너무나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해 왔고, 힘의 안배를 위해 어느 특정인을 키우지도 않았고, 유신체제로 계속 더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참이었기 때문에 지금 절대권력이 없어진 공백 상태에서는 그 빈 공간을 먼저 차지하는 자가 힘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사령관은….』
하고 제럴드는 말했습니다.
『군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데다, 군관의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막강한 힘이 부여되었고, 박정희가 은밀히 키워준 하나회의 리더다. 거기다가 걸림돌이 되는 선배(아마 계엄총사령관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를 제거했으니, 이제 그 자리는 그의 측근이 앉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당신의 사령관은….』
여기서 나는 그에게 당신의 사령관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빙끗 웃더니, 앞으로의 수순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국내에 혼란을 조장할 것이고, 그 혼란 속에 군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합리성을 만들어 내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것은 분노로 뛴 것이 아니라,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내 조국에 대한 불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애국자라거나, 어떤 이념이 확고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역사의 소용돌이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혼탁해지고 있구나 하는 불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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