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인정받는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성장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쟁과 협동의 조화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본격화된 것은 삼성그룹이 사업참여를 결정한 83년 초다. 당시 한·미 합작사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를 생산하던 삼성이 시장이 크고 제품이 표준화돼 있는 D램 사업 진출을 단행한 것이 국내 메모리 반도체 산업 역사의 시작이다.
그리고 개발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인 그해 12월 1일 64K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 자체 개발했다고 발표, 국내 전자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D램의 선두기업이었던 일본 업체들조차 5∼6년이나 걸렸던 64KD램을 일부 가전용 LSI반도체 생산 경험이 전부인 삼성이 개발했다는 것은 세계 반도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당시 64KD램 생산업체는 모토롤러 등 미국의 4개사와 히타치 등 일본의 6개 업체로 총 10개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른바 「반도체 기적」의 서곡에 불과했다.
삼성에 이어 LG와 현대그룹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속속 진출하면서 국내 반도체 산업은 삼성·현대·LG 3대 재벌이 모두 참여, 자존심을 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삼성은 이어 1년 만인 84년말 2백56KD램 개발에 연이어 성공, 85년 초부터 샘플을 출하하는 초고속 성장을 계속하게 된다.
때맞춰 86년부터 반도체 경기가 유례없는 호황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삼성의 고속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삼성은 86년 7월 마침내 1MD램 개발에 성공, 메모리 반도체의 메가시대 진입에 성공, 87년부터 본격화된 호황기에 막대한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이때의 성공적인 투자는 삼성전자가 세계 1위의 D램 업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초석이 됐다는 분석이다.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체 기술력을 쌓은 삼성은 4MD램부터는 미국, 일본의 선진업체들과 거의 동시에 제품을 출하할 수 있게 됐고 16MD램부터는 이들보다 앞서 제품을 양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메모리 업체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LG(금성일렉트론)와 현대전자 등도 90년대 들어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 단시일에 세계 10대 D램 공급업체 대열에 들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부터 64MD램과 2백56MD램을 세계 처음으로 개발한 것은 물론이고 꿈의 반도체로 불리는 1GD램 개발까지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독식하고 있다.
95년은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이 지금도 그리워하는 최고의 해였다. 세계 전자경기가 호조를 보였고 각종 고화질 영상 그래픽 처리를 필요로 하는 응용 소프트웨어 보급 확대와 멀티미디어 확산에 힙입어 국내 업체들이 주력하고 있는 D램 경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이 해 삼성전자는 3조원에 육박하는 경이로운 순익을 기록했으며 현대와 LG도 1조원 안팎의 순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처럼 96년부터 3년 연속 불어닥친 D램 공급과잉으로 인한 가격 폭락은 반도체 업계에 예기치 않은 구조조정의 바람을 잉태하고 있었다. 급작스런 외환위기는 산업 전체의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반도체 업종도 이같은 대세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결과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빅딜.
LG가 보유한 LG반도체 주식 전량을 현대전자에 매각하는 형식으로 결정된 반도체 빅딜은 적지 않은 전문가들의 반대와 해당업체 직원들의 반발에 부닥쳐 완전타결에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기는 하다.
어쨌거나 국내 반도체 산업은 이제 전통적인 3사 체제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2사 체제로 극적인 국면전환을 꾀하게 됐다.
한편 빅딜의 회오리에도 불구하고 최근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3년 동안의 불황을 건너 본격적인 회복국면으로 호전되고 있다는 분석이 일제히 제기되는 상황이다.
데이터퀘스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반도체 시장조사기관들의 99년 전망도 D램시장이 본격적인 회복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99년 세계 D램 반도체 시장은 6∼12%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처럼 D램시장의 활황이 기정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은 무엇보다 대용량 메모리가 필요한 차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운용체계(OS)의 등장이 예상되고 있는 데다 세계적인 현안으로 부상한 컴퓨터 2000년 표기 문제 등으로 예년에 비해 메모리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여기에 D램 경기 불황이 길어지면서 상당수 해외 메모리 반도체업체들이 지난해부터 D램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하는 사례가 크게 증가, 전반적인 공급 능력이 줄어든 것도 올해 메모리 반도체 경기를 밝게 보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반도체 빅딜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빅딜 주창자들의 계산대로 양사의 합병이 탁월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느냐에 따라 국내 반도체 산업 경기는 상당한 편차를 보일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고비만 슬기롭게 넘길 경우, 국내 반도체 산업은 95년의 호황에 버금가는 황금기를 다시 한번 맞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최승철기자 scchoi@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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