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는 나에게 명함을 주고 갔다. 그 명함을 보니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은 KIST가 아니고 그 산하에 있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대형 국책 사업만을 맡고 분야별 다른 전문연구는 분담하도록 했다. 그래서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한국전기시험연구소는 트로이카로 불리던 3대 전자연구소였다. 이 전자산업 관련 연구소는 모두 KIST에서 파생된 것이기는 하지만 각기 출연한 정부 부처는 달랐다.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는 동력자원부가 맡고 한국통신기술연구소는 체신부,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상공부가 담당했다.
한성우는 한 해 전만 해도 KIST에 근무했었다. 그는 통신기술 연구소가 발족되면서 그곳에서 나와 통신연구원으로 있었던 것이다. 주로 전화교환·전송·단말기 등 통신 분야를 연구했는데 그것도 컴퓨터에 의해 제어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컴퓨터 연구의 범주에 들어갔다. 통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성우를 알게 되면서였다.
그 다음날 일요일이었다. 휴일에도 일한다고 해서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저 최영준입니다.』
『누구? 최 누구라고요?』
『최영준입니다.』
『누구시더라?』
나는 매우 낭패스런 기분이 들었다.
『동양컴퓨터 기술산업의 이길주 차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최영준입니다. 어제 저를 만나셨잖습니까.』
『아, 이런. 내 정신이 없어서 퍼뜩 생각 안난다. 어제 이 차장과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아직도 깨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 이름과 목소리를 입력하지 못했는가 봐. 아니, 입력은 되었는데, 메모리가 시원찮아 기억을 불러내지 못했군. 내 CPU를 수리해야 할 것 같군. 이제 생각나는군. 사전 없이 영어 원서를 읽던 친구 맞지?』
사전 없이 영어 전문서적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가. 그것은 배우는 자의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많은 기술자들이 그렇지 못했다. 영어를 해독하는 것은 둘째치고 책을 별로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고 습득한 지식과 기술만을 가지고 울궈먹으려고만 하였다. 그래서 그 분야에서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난감해 하면서 갈팡질팡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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