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격동의 시대-또하나의 올림픽 (8)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시스템공학센터(SERI)가 88년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 개발 주관기관으로 선정됐던 86년 1월을 전후하여 한국의 컴퓨터기술 수준을 보는 국내외 시각은 대체적으로 낙관 반, 비관 반이었다. 낙관론 쪽은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주로 하드웨어 장비 위주로 보려는 시각이었는데 한국의 정보산업 시장규모나 관련장비를 공급하려는 IBM·AT&T·금성사 등 스폰서들이 질적인 면에서 우수하다는 평판을 근거로 하는 것이었다. 낙관론은 특히 과학한국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국내 정보산업의 활성화와 컴퓨터기술의 향상을 꾀하려는 사람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비관론 쪽은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급 측면을 중요시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뤘다. 이런 시각들은 84년 LA올림픽 전산시스템인 SIJO(System Informatique de Juex Olympique)를 도입하자는 시각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전히 SERI의 소프트웨어 개발능력이나 시스템 개발 주관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비관론은 주로 정부 관계자나 SERI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앞서 SERI는 85년 1월 가깝게는 제66회 강원체전(85년 10월, 춘천·강릉·원주 분산개최)을 준비하고 멀게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겨냥해 올림픽전산화사업팀을 구성했다. 83년 인천체전팀과 84년 대구체전팀을 모두 흡수한 것이었다. 이 팀에는 88년 10월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팀장인 전산개발부장 김봉일(金鳳一·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 소장)을 위시하여 허채만(許採萬·재미) 안영경(安英景·핸디소프트 사장) 최정호(崔正鎬·한국통신 ICIS개발단 개발1팀장) 권영범(權榮範·영림원 사장) 등 최정예 연구원 69명이 전담 연구원 자격으로 투입됐다.
86년 제67회 서울체전은 여느 해와는 달리 86년 아시안게임 예행연습(리허설)을 겸하여 그해 6월에 치러졌다. 86년 3월 SERI는 올림픽전산화사업팀을 전산개발부내 제14그룹(별칭 올림픽 전산그룹)으로 공식 조직화했다.
86년 9월20일에 개막된 제10회 아시안게임은 10월5일까지 16일 동안 27개국 4천9백여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27개 종목 2백69개 세부종목의 경기가 33개 경기장에서 펼쳐졌다. 84년 제65회 대구체전 때 원형이 만들어진 올림픽경기정보시스템(GIONS:Games Information Online Network System)이 경기기간에 맹위를 떨쳤다.
참고로 86아시안게임 당시 SERI가 보유하고 있던 컴퓨터 장비들로는 주전산기의 경우 컨트롤데이터의 「사이버 170-835」(2M워드·3MIPS), IBM의 「IBM 3083」(2MB·8.4MIPS), NAS의 「AX/XL V50」(32MB·20MIPS), 퍼킨엘머의 「퍼킨 엘머」(1MB), 디지털의 「PDP 11/40」(32kB)와 「VAX 11/750」(6MB) 등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비는 SERI의 고유업무에 할당돼 있었으므로 GIONS 운영을 위해서는 새로운 대규모 장비가 필요했다. 86년 6월 서울체전에 앞서 한국IBM과 금성사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컴퓨터 장비 스폰서 계약을 맺고 SERI의 소프트웨어 개발지원에 나섰다. 이미 미국 본사가 64년 도쿄올림픽 이후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와 장기 스폰서 계약을 맺고 있던 한국IBM은 86아시안게임 전산시스템 주전산기로 대형컴퓨터 「IBM 4381」 2대와 각 경기장에 설치할 중형컴퓨터 「S/36」 48대를 지원했다. 여기에 다시 경기결과 등을 입력하고 조회할 수 있는 워크스테이션 「IBM 5550」이 4백59대, 검색결과를 인쇄할 수 있는 레이저프린터 1백17대가 제공됐다. 금성사는 AT&T의 중형컴퓨터 「3B20」 14대를 지원했다. 이같은 시스템의 구성은 88올림픽 때도 대부분 그대로 재현됐다.
아시안게임에서 사용된 GIONS는 크게 선수등록·경기운영·경기결과처리·경기통계처리·경기정보제공 등 5개 업무를 세분화하여 처리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공식집계에 따르면 GIONS는 아시안게임 기간중 7천5백여건의 정보를 처리하였고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의 종합정보망시스템(INS·88올림픽 때 WINS로 개칭됨), 쌍용컴퓨터(현 쌍용정보통신)의 대회관리시스템(SOMS), 한국전산(현 교보정보통신)의 대회지원시스템(SOSS)과 연계된 정보조회건수는 66만7천여건이나 됐다. GIONS는 역대 아시안게임은 물론 역대 올림픽 전산시스템 가운데에서도 기술이 가장 진보된 시스템으로 평가됐다. INS·SOMS·SOSS 등을 포함한 다른 전산시스템의 성능과 이들의 개발을 주관한 SERI의 역량에 대한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팀장 김봉일에게는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체육훈장 백마장이 수여됐고, 안영경·최정호·유이근 등 30여명의 SERI 연구원이 국민체육진흥 유공자 또는 아시안게임 유공자 등의 상훈으로 장관표창을 받았다.
바로 그 즈음, 그러니까 아시안게임이 끝난 직후인 10월 초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SERI를 88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 개발 주관기관에서 해지한다는 공식발표를 내놓았다. 조직위 측은 2년 앞으로 다가온 서울올림픽 추진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때는 또한 SERI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일부 업체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SERI가 인천체전·대구체전·강원체전 등을 거치면서 착실히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 전산시스템 원형을 개발해나가던 당시만 해도 한국데이타통신·쌍용컴퓨터·한국전산 등 3사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던 회사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86년 1월 SERI 주관 아래 86아시안게임 전산시스템 개발회사로 선정되더니 결국은 88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 때는 SERI의 지휘를 받지 못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SERI가 주관기관으로서 계약이 해지된 것은 성기수의 후원자였던 노태우(盧泰愚) 위원장이 86년 3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를 떠나 정치에만 전념하고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성 박사를 겪어보니까 과학자들을 존경하게 됐다』라며 성기수의 능력과 SERI의 가능성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노 위원장이었다. 86년 5월 박세직(朴世直·자민련 의원) 위원장체제가 들어서자 조직위의 대체적인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87년3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올림픽전산운영협의회라는 조직을 발족시켰다. 전산시스템 개발과 운영에 대한 체계적 정책결정을 내리는 기구로서 체신부 차관이 의장을 맡도록 돼 있었다. 위원들로는 SERI 소장, 안기부 전산실장,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 올림픽사업단장,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쌍용컴퓨터 사장, 한국전산 사장, 조직위 기술전문위원회 위원장, 기술전문위원회 산하 통신분과위원장, 동 음향분과위원장, 동 전산분과위원장, 조직위 기술국장 등이 당연직으로 참석했다. 이로써 86아시안게임 당시까지 KAIST 원장의 위임을 받아 전산시스템 개발을 주관하던 SERI 소장은 다른 3개 회사대표들과 같은 위원자격으로 내려앉게 됐다. 87년 3월 당시 올림픽전산운영협의회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로는 오명(吳明·의장·전 체신부 장관)과 성기수 외에 김낙성(金洛性·한국통신 올림픽사업단장·전 한국통신케이블TV 사장) 이용태(李龍兌·한국데이타통신 사장·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박병철(朴炳哲·쌍용컴퓨터 사장·88년 작고) 전광로(田光輅·한국전산 사장) 박성득(朴成得·조직위기술전문위원회 위원장·당시 체신부 통신정책국장·현 한국전산원장) 등이었다.
3월에 구성된 전산운영협의회는 3개월 뒤인 87년 6월에서야 정식기구로서 발족을 보았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올림픽조직위는 전산운영협의회를 경기정보처리분야 실무협의반과 관리지원분야 실무협의반 등 2개의 운영체제로 나눴다. 이같은 운영체제 설정을 놓고 위원들간에 마지막까지 양보없는 조정전쟁을 치렀다. 결국은 여기서 SERI와 한국데이타통신 등 3사간에 역할이 갈렸다. 경기정보처리분야 경우 SERI가 올림픽 주전산시스템인 GIONS와 한국데이터통신의 WINS 운영을 통할하고 실무협의반장은 소장인 성기수가 맡기로 했다. 또 다른 운영체제인 관리지원분야 실무협의반은 모든 것을 안기부에 일임키로 했다. 쌍용컴퓨터의 SOMS와 한국전산의 SOSS 역시 안기부가 통할키로 한 것이다. 크게 축소될 뻔했던 SERI의 위치는 86아시안게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조직위나 전산운영협의회가 모두 SERI의 능력과 위치를 정확하게 인정한 결과였다.
84년 대구체전에 원형이 만들어져 88올림픽 때 완성된 GIONS는 올림픽에 처음 컴퓨터가 도입된 64년 도쿄올림픽 이후 가장 뛰어난 전산시스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GIONS는 또한 경기장별로 독립된 컴퓨터(S/36)와 이들을 종합적으로 연결한 중앙의 대형컴퓨터(IBM 4381)로 구성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분산처리방식이 도입된 시스템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대형컴퓨터 기반의 전산센터(OCC)를 두 곳에 마련하여 모든 경우의 돌발사태에 대비한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올림픽기간 동안 GIONS는 사상 최대인 1만5천5백여건의 정보처리, 그리고 무려 4백19만여건의 정보조회건수를 기록했다.
1백61개국 선수와 임원들이 참가하고 50억 인구가 함께 지켜본 제24회 서울올림픽은 88년 9월17일 개막돼 10월2일까지 16일 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GIONS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별관에 마련된 제1전산센터와 을지로 한국통신중앙전산센터에 설치된 제2전산센터를 통해 34개 경기장·행사장·본부호텔(신라호텔)·메인프레스센터(MPC)·국제방송센터(IBC)·경기안내센터·선수촌 등을 한치의 오차 없이 연결하여 원하는 정보를 온라인 출력해줌으로써 88올림픽을 대성공으로 이끌게 한 밑거름이 돼주었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들은 『또 하나의 올림픽을 치러내게 한 GIONS는 장외 금메달감』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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