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들어 일본 주요 반도체업체들의 해외 생산거점 폐쇄가 세계 반도체업계 전반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9월 1일 히타치제작소, 2일 미쓰비시전기, 5일 후지쯔, 9일 마쓰시타전기 등 일본의 비중 있는 반도체업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미국과 영국의 반도체 생산거점 폐쇄를 발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업체들의 해외거점 폐쇄는 이미 올해 초 최초로 발표된 미쓰비시전기의 미국 전공정 공장폐쇄 당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발표 당시 미쓰비시측이 내세운 폐쇄배경의 대부분이 형편이 비슷한 다른 일본업체들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사업합리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본 반도체업체들의 해외거점 폐쇄. 전반적인 반도체 시황악화로 피할 수 없는 선택임은 분명하나 해당지역 직원들과 해당지역 경제에 상처와 부담을 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 2년간의 메모리 시황 폭락이 큰 타격이었다.」 「실적 회복을 위해 세계 규모의 생산체제 수정이 불가피했다.」 지난 4일 이 같은 설명이 곁들여진 후지쯔 경영진측의 공장폐쇄 방침을 전해들은 영국 더램공장 직원들은 적지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장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봄까지만 해도 후지쯔측은 「더램공장을 D램 거점에서 로직 반도체 생산거점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표명해 왔기 때문이다. 후지쯔는 다소 급작스레 공장폐쇄를 발표하면서 더램공장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로 생산라인의 낙후성을 들었다.
그러나 일본의 관련 전문가들은 더램공장보다 더 낙후된 공장이 일본 국내에도 여러 개 있다는 점을 들어 후지쯔측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차라리 국내공장들을 상대로 공약해온 「고용유지」를 더 큰 이유라고 보고 있다.
또 후지쯔에 앞서 미국공장 폐쇄를 결정한 히타치·미쓰비시·오키전기 등도 국내 고용을 최우선하기 위해 이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즉 일본 주요 반도체업체들이 세계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공통된 인식을 앞세워 전세계 차원의 구조조정이라는 미명 아래 해외공장부터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계 반도체 생산공장 가운데 가장 먼저 폐쇄 발표가 있었던 곳은 올 1월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전공정 거점. 이 거점은 90년 설립돼 지난 3월 공장 문을 닫기 직전 4MD램을 생산했었다. 비교적 생산규모가 작은 이 공장에서 당시 해고된 종업원 수는 약 1백80명이었다.
그 다음이 2월 발표된 히타치제작소의 「트윈스타 세미컨덕터」 철수. 미국 TI와의 합작 반도체공장인 트윈스타는 설비투자비 분담의 국제적인 모델이라는 평을 받으며 지난 95년 1월 설립된 회사였으나 반도체분야 최초의 미·일간 대형 합작 실패라는 오명을 남긴 채 TI의 독자경영 체제로 들어갔다. 전체 지분의 36.46%를 보유하고 있던 히타치의 철수로 이 공장의 생산체제는 비메모리분야로 전환되면서 축소됐으며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과정에서 적지않은 해고가 뒤따랐다.
또 8월에는 오키전기공업이 미국의 반도체 후공정 자회사인 오키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OSM)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이 공장에는 약 1백30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었으나 9월 30일자로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모두 일자리를 잃게 됐다.
그리고 9월 들어 잇따라 폐쇄가 발표된 대형공장 히타치 세미컨덕터 아메리카·미쓰비시 세미컨덕터 아메리카·영국 더램·아메리카 마쓰시타 반도체(MASCA) 등에서 쏟아져 나올 각각 6백50명·2백30명·6백명·3백40명 규모의 해고직원을 합치면 올 한해 일본계 반도체공장에서 해고되거나 예정된 직원 수만도 2천명에 육박한다.
현재까지 폐쇄가 결정된 일본계 반도체 해외공장은 총 8개. 5일 발표된 후지쯔 더램공장을 제외하곤 지금까지 세계 언론에서 해고노동자 문제에 대한 보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더램공장 노동자 문제가 부각된 것도 더램지역이 현 영국총리인 토니 블레어의 선거구로 향후 3년간 1천파운드(약 2천억원) 추가 예산을 편성하는 등 지역대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뿐이다. 게다가 한 기업이 해외거점을 폐쇄하는 문제는 제3자가 왈가왈부할 성격도 아니어서 영국정부는 후지쯔의 결정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일본의 일부 반도체 관련 전문가들은 최근의 반도체 시황을 볼 때 어차피 해외거점 폐쇄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업구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국내와 해외 구분없이 시장성과 사업성이 떨어지는 거점부터 상황에 맞춰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D램 과잉투자라는 경영진의 잘못된 판단으로 발생한 사태에 직원들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국내공장 노조측의 강경한 입장을 받아들여 큰 문제가 없는 해외거점을 우선 폐쇄하고 반도체 시황 추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놓고 볼 때 해외거점은 사실상 언제든지 사업성과 시장성이 떨어지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카드인 셈이다. 사실 사원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자국 직원들과 경제를 위해 해외지점 직원들을 우선 등한시하는 것은 국익이라는 논리상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번 일본반도체업체들의 해외사업장 폐쇄는 해외투자자 유치에 힘쓰고 있는 우리에게도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심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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