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특강] 전파희소성 신화의 붕괴와 미디어산업

申東鎭

86년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88년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석사

95년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언론학박사

95∼97년 방송위원회 선임연구원

91∼97년 경남대, 원광대, 계명대 강사

92년∼현재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강사, 문화방송 기획국 정책전문위원

우리는 매일 매스미디어를 접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신문을 손에 잡는 것이다. 복잡 다기화된 현대 사회에서 주위환경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통해야만 된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주로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주위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고 생활했지만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도시생활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디어는 우리 현대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창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생활 수단이 되어버린 매스미디어, 특히 방송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을까.

우선 일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수면시간, 학교나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여가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미디어 접촉행위이다. 인쇄 매체보다 방송 매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또한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방송매체에 노출될 수 있다.

직장에서 일하는 가운데 심지어는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에 까지 TV가 설치된 곳이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TV수상기의 예약 기능을 사용하여 아침에 잠을 깨워주는 알람기능을 이용하기도 한다. 방송매체의 일상성은 이같은 미디어의 편재성(偏在性)에 기인한다.

다음으로는 사회적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방송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 물론 보다 정확하게는 방송사마다 주안점을 두는 목표 수용자는 있다. 방송 메시지가 도달되는 광역성, 이 메시지에 노출되는 수용자들의 무차별성 등으로 인해 방송은 수용자들에게 정서적, 행동적 차원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같은 막강한 「사회적 힘」을 행사하고 있는 방송에 대해 규제가 필요하다는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방송은 전파를 이용하며, 전파의 속성상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전파 자원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전파의 희소성 원리는 방송의 공공성을 주장하고 요구하는 물리적 기반이다. 이같은 전파의 국민소유적 발상은 공영방송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민영방송이라 할지라도 일정 수준의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전파의 희소성 원리에 더해 사회 여론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방송은 국내, 외 주요 사건이나 이슈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며, 수용자들은 또다시 이들 정보를 바탕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수용자들은 방송이 전해주는 사건이나 이슈의 사실은 물론 방송이 보여준 「강조점」 「논조」 등을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수용자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 방송이 보여주고 강조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태도나 의견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 준다. 또한 우리의 사회적 대화에는 방송이 보여주거나 전달한 이슈를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즉 방송은 수용자들의 의제를 설정하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여론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에 바탕을 두고 방송이 자국의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매체라고 주장하는 진영은 방송의 문화적 속성과 가치를 강조한다. 방송의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진영은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 수용자들의 문화적 향유 욕구의 충족, 건전한 사회, 윤리, 도덕의 영향을 많이 따진다.

방송에 대한 규제는 전파가 희소성 자원이라는 것과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이같은 논리적 근거는 지상파 중심의 사고 경향이 강한 것으로서 최근 뉴미디어가 등장함으로써 다소 그 근거가 약화되는 측면이 있다.

케이블 TV는 지중화(地中化)된 유선망을 따라 방송메시지를 전달하고, 위성방송의 경우는 지상파 방송과 전파의 성격이 전혀 다른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존 지상파 중심의 전파 방송외에 수많은 채널이 가능하다. 즉 전송수단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제한된 주파수 채널의 지상파 방송은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반면에 뉴미디어를 이용한 방송은 제한되고 원자화된, 그리고 방송 수신을 원하는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다.

매체별 물리적 특성과 시청자들의 방송수용 동기도 다르다. 이 때문에 전파의 희소성 원리만을 내세워 방송의 공영성과 규제를 강조한 논리는 다소 빛이 바래게 되었다. 전파희소성의 「신화」가 붕괴된 것이다.

뉴미디어는 방송의 문화적 가치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즈니스적 측면이 강하다. 우선 불특정 다수라는 시청자가 아니라 소수의 제한된 시청자군이라는 목표시청자를 대상으로 한다. 기존의 지상파 방송은 거의 무료이다. 직접적 시청 비용은 들지 않는다.

이에 반해 뉴미디어는 직접적 시청비용이 투입돼야 한다. 기본적으로 뉴미디어 방송은 유료시청을 전제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를 운영하는 방송사업자는 「방송사업」을 광고하는 영업활동과 시청자를 확보하기 위한 마케팅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수십, 수백개의 채널이 제공됨으로서 내적 경쟁도 치열해 진다. 문화에 강조점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비즈니스의 세계이다. 방송의 윤리나 도덕이 강조되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경쟁의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세계의 공영방송은 위기를 맞았다.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게 된 BBC는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과도한 제작비, 새로운 장비 도입, 기술발전에 따른 전문인력의 확보 등 재정수요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상업적 요소도 도입했다. BBC월드와이드는 수익사업이 가능하도록 상업성과 공영성을 분리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세계적 공영방송의 위기와 미국의 신 보수주의 영향으로 각 산업 분야에 대한 규제완화와 탈규제가 주된 흐름을 형성했다. 96년에 개정된 미국의 텔레커뮤니케이션법(Telecommunication Act)은 탈규제와 커뮤니케이션 산업의 경쟁을 촉진케하는 산물이었다. 통신과 방송산업을 통괄하고 있는 이 법의 개정으로 그동안 금지사항이었던 통신사업자와 방송사업자의 상호 시장진입이 허용됐고, 대폭적으로 구조적 규제가 철폐됐다. 방송과 통신업계의 자율 경쟁과 시장경제 원리가 지배하게 된 셈이다.

미국의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은 시장경쟁과 철저한 시장성 조사가 밑바탕이 되고 있다. 어느 매체든 도입되기 전에 또는 기술이 개발되기 전에 시장성과 효용성을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매체기술은 새로운 시장과 동시에 등장한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매체시장은 새로 등장한 뉴미디어를 위해 더 큰 파이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이같은 시장 실패의 사례는 많다.

오늘날 TV 방송산업의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내적 경쟁은 물론 외적 경쟁상대도 많아지고 있다. 케이블, VCR, 위성방송 그리고 온라인 컴퓨터 네트워크의 등장은 수용자들의 여가시간 쟁탈을 둘러싸고 새로운 경쟁을 가져오고 있다.

이같은 환경의 급변은 방송산업의 규제와 정책에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지난 96년의 텔레커뮤니케이션법으로 구체화됐다.

앞으로의 방송 환경은 그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방송매체는 다른 영상매체들을 비롯 사용자들의 시청시간과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경쟁하게 되어 더욱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케이블 TV가 가까운 장래에 급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우며, 이같은 상황에서 네트워크는 지배적 위상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케이블과 견주어 볼 때, DBS는 비슷한 요금수준에 훨씬 많은 수의 채널을 제공할 수 있으므로 주요한 경쟁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90년대 들어 세계적 흐름을 반영, 지상파 방송에서 SBS를 출범시켜 MBC와 KBS의 독과점 시장에 경쟁환경을 만들었다. 또한 인천, 부산, 대구, 광주 등 각 주요 거점도시에 지역민방이 출범함으로써 구조적 규제차원의 시장진입 금지는 무너졌다. 여기에 케이블 TV가 방송을 개시하고, 위성방송이 시험방송을 실시함으로써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여는 듯했다.

그러나 이같은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장미빛 환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IMF이후 기존 지상파 방송사도 경영이 어려워졌다. 지역민방과 케이블 텔레비전은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고 쓰러진 방송사도 있다. 위성방송은 법 제정이 늦어짐으로써 아직 본방송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논자들은 법 제정이 지연되어 위성방송 자체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위성방송을 살렸다는 역설을 편다. IMF체제 이전에 위성방송이 출범하였다면 지금 케이블 텔레비전이 겪고 있는 경영난을 똑같이 당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가전체의 이익차원에서 본다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맥콤(McCombs)의 「일정성의 원리(Principle of Relative Constancy)」에 따르면 케이블이나 위성방송 등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가 등장해도 미디어 수용자들이 지출하는 미디어 소비 총액은 변하지 않는다는 밝히고 있다. 즉 사람들은 미디어 접촉행위에 제한된 지출을 하며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도 미디어 소비 비용은 거의 일정하다는 것이다. 매체측면에서 볼 때 이같은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한정된 시장을 각 매체들이 분할하여 침투한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의 발달과 방송산업의 국제화 추세 속에서 우리의 방송산업은 정책선택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다양한 수용자들의 다양한 방송문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다매체」 방송은 밀려오는 외국방송에 대응한 국제경쟁력 확보와 국민경제적 차원에서의 방송수요 및 사회경제적 비용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이제는 방송산업의 위기적 상황을 타개할 정책적인 문제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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