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강서구 염창동에 있는 컬러사진 현상기 전문업체인 CK산업(대표 이병극)의 회의실에서는 10여명의 중소기업 사장들이 모여 PCB 한장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번 행사는 지난 6월 결성된 이업종 교류모임인 한국신기술사업협회(KNTBC, 회장 이병극)의 3번째 모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날 모임의 공식 안건은 일본의 이업종 교류모임인 일본아스연구회(회장 나카니시 모토야수 스즈키총업그룹 부회장)측이 제안한 네트워크 전용 PCB의 상품화 가능성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먼저 지난달 일본아스연구회에 참석했던 이병극 회장과 이부경 부회장(리테일 네트워킹 대표)이 각각 이 협회의 첫번째 공동 사업과제로 이 보드의 상업화 가능성을 제안한 후 나머지 회원들이 한사람씩 돌아가며 이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격론 끝에 이 사업에 대한 결론은 세부 기술검토를 위해 일본을 한번 더 방문한 후 결정하기로 했다.
또한 벤처기업의 대표적인 모임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기우회(회장 이기원)는 컴퓨터 HW, SW를 비롯해 산업전자, 전자부품 등 색깔이 다른 11개 업체가 기술적인 부문에서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면서 IMF체제 하에서도 회원사 모두가 아직은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이업종 교류활동은 이처럼 최근 국내 거의 모든 산업분야가 IMF 등으로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가운데 불황극복을 위한 가장 유력한 대안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업계에는 현재 신기술사업협회 이외에도 기술신용보증기금 주도로 결성된 기우회, 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기업인들의 모임인 에바(EVA) 등 회원간 모범적인 교류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업종 교류회가 다른 산업분야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KNTBC 회원들은 PCB 사업성 검토 후 약 1시간에 걸쳐 CK산업의 컬러사진 현상기 생산라인을 돌아본 후 컬러사진 현상기분야 국내외 기술 및 시장동향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기회도 가졌다.
특히 두번째 토론에서는 경쟁업체에 흘러들어가면 회사경영에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는 주요 부품의 설계도면과 시장동향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거침없이 도마위에 오르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이루어졌다. 이어 회원들이 주위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그동안의 회포를 푸는 것으로 모임은 끝이 났다.
이 모임은 그 출발에서부터 철저하게 신기술의 사업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중소기업 사장들의 친목모임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에 따라 이 모임에 참여하는 회원은 적어도 한두 가지 기술분야에서만은 엔지니어 못지않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중소기업체 사장들로 구성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최근 휴대형 영상노래반주기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벤처트라이의 양웅섭 사장은 은행원 출신으로 PCB업계에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정보통신분야 유망 신사업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후 지난해 독립한 케이스로 특히 기술경영분야에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 있다.
이에 비해 유일한 홍일점인 리테일 네트워킹의 이부경 사장은 POS터미널을 공중전화회선으로 연결, 중앙전산센터에서 집중처리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한 회사를 이끌고 있는 전형적인 엔지니어.
이밖에도 주요 회원사인 프라임정보통신(대표 이창배)은 인터넷, 인트라넷 및 빌딩자동화시스템 등의 분야에, 고려미디어(대표 박규진)는 음성인식 관련 제어기술분야에, 효성전기(대표 임봉순)는 커넥터, 트랜스포머, 그리고 적외선 센서를 이용한 절전형 스위치 시스템 등 전자부품분야에서 각각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KNTBC는 앞으로 매월 한차례씩(둘째주 화요일)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물론 정보교류 및 업무협약을 맺고 있는 일본아스연구회 등과 협력해 발굴한 전기, 전자, 통신, 환경 등의 분야 신기술 및 신사업 아이디어에 대한 정보를 회원사를 통해 사업화하거나 투자가와 연결해주는 일을 적극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병극 회장은 『현재 국내에는 많은 이업종 교류모임이 있지만 단순한 친목모임 성격이 강해 별다른 성과가 없는 형편』이라며 『KNTBC는 고급정보와 아이디어를 사업화함으로써 실제 돈이 되는 정보교류를 활성화하는 등 이업종간의 협력으로 IMF 위기를 탈출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96년 6월 첫 모임을 갖기 시작한 기우회(회장 이기원 기인시스템 사장)는 회원간의 호흡이 잘 맞기로 유명하다.
기우회는 회원이 11명으로 소규모인데다 소프트웨어, 기계제작, 컴퓨터부품 제조 등 업종이 정보통신분야에 집중돼 있지만 사업영역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우선 회원간에 쓸데없이 경쟁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분야의 고급정보를 이곳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등 장점이 많다는 설명이다. 이에 비례해 회원들이 그동안 얻은 소득도 많을 수밖에 없다.
자동제어기기를 생산하는 기인시스템 이기원 사장의 경우 최근까지 관련 소프트웨어를 외국에서 수입해 사용해 오다가 이 모임에서 우연히 중앙소프트웨어의 최경주 사장이 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날로 협력업체를 바꾸기도 했다.
또 멀티비전시스템을 생산하는 시공테크의 박기석 사장도 오락용 로봇의 기능을 높이기 위한 기술을 찾아 1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이곳에서 우연히 기인시스템의 도움으로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박 사장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회원들에게 한번 연락을 해보면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를 추천해주기 때문에 큰 도임이 됐다』고 전한다.
기우회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 96년 기술신용보증기금 강남지점장인 하순봉씨가 기술신보에서 우량기업으로 선정된 10개 업체간에 당시 큰 인기를 끌던 이업종 교류모임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한 것이 계기가 돼 이루어졌다. 하씨는 『정부가 주도하는 모임은 회원도 많고 형식적인 만남으로 끝나기 쉽지만 이런 소규모 민간모임은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회장을 맡고 있는 이기원 사장은 『앞으로 모임을 계속하면서 공동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등 공동 마케팅 활동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기업인의 모임인 에바(EVA)는 기우회보다 한해 빠른 95년 결성된 후 지금까지 회원들간 친목도모 및 연구정보 교류의 장으로 기능해왔다. 이 모임은 특히 사업분야가 반도체 개발 한 품목에 집중돼 있는데다 회원자격 또한 ETRI라는 정부출연연구소 출신에 제한돼 있는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현재 활동중인 회원업체 숫자는 33개사.
이들 중소기업이 보여주고 있는 이업종 교류 성공사례는, IMF 등으로 우리나라 경제계가 지난해 말부터 활력을 잃고 거의 가사상태에 빠져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서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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