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문헌에는 흔히 운양호가 청국으로 향하다가 급수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표면상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이었다. 운양호는 계획대로 예정된 뱃길을 따라 1875년 8월 21일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 부근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는 식수를 찾는다면서 보트를 내려 이노우에 함장 이하 수십 명이 탑승한 다음, 임의대로 연안을 탐색하며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한편,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조선측 포대 수병들은 여러 차례 손짓발짓을 해대며 접근하지 말 것을 알린 후 그들에게 포격을 가하게 된다. 일본의 계략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경강 어귀의 요새지대이며 병인, 신미 두 차례의 난에 쓰라린 체험을 맛본 것이 당시의 수비병이었다. 그런 만큼 예고없이 침입해 온 외국 군함에 대해 포격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거리도 짧고 사람의 돌팔매보다도 정확성이 떨어지는 포의 포탄은 보트를 한참 빗나가고 말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운양호는 그들의 보트를 철수시키면서, 무서운 함포로 우리 초지진에 포격을 가하여 진지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한순간에 초지진을 파괴한 운양호는 뱃머리를 돌려 영종진의 포대에도 맹포격을 가하였다. 물론 영종도의 포대에서도 포격을 감행했지만 운양호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영종진의 포대도 초토화되자 운양호에서는 그들의 육전대를 상륙시켜 방화, 살육,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조선측이 보유하고 있던 포는 구경 12밀리미터에 사정거리 7백미터를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대환구포를 어설프게 비치한 정도였다. 또 병사와 포술도 화승총을 다루는 정도였고, 명중률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운양호측의 함재포는 1백10근 및 40근의 신예 무기로서 명중률이 매우 높아 양방의 전투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맹렬한 포격과 그들의 상륙에 의해서 영종진 수비병 4백, 5백명은 혼비백산하여 대부분이 패주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조선측은 전사자 35명에 포로 16명을 냈으며, 대포 36문과 화승총 1백30여 정 등 많은 무기와 장비를 약탈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의 운양호는 불과 2명의 경상자를 내고 약탈한 물품을 싣고 유유히 나가사키로 돌아가 버렸다.
일본.
김지호 실장은 결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한 운양호사건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일본의 비열함에 치를 떨었다.
일본. 그들은 미국에 자신들이 당한 것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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