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한국과학기술자의 비전

한, 미 양국의 과학기술 교류를 모색키 위한 제6차 한, 미 포럼이 6월에 워싱턴시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우리는 늘 한, 미 포럼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6차에 걸친 포럼이 전부 미국에서만 열렸으므로 개최지 우대조치에 따라 미, 한 과학기술협력 포럼이라고 불려 왔다. 미국의 과학기술을 벤치마킹하려는 한국의 노력이었음을 입증하는 셈이 된다.

제6차 포럼은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급변하는 환경에 과학기술정책상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주제로, 그것도 미국의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기조가 될 연구보고서를 미국 하원 과학위원회에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앞둔 1944년 11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후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청사진 개발을 버니바 부시에게 지시하자 그는 1945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시 보고서다. 기초연구에 대한 강력한 정부지원을 통해 신기술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로 이 보고서의 건의대로 미국과학재단(NSF)이 창설됐다.

이후 냉전체제 하에서 과거 50년간 여러가지 변화와 굴곡은 있었지만 부시보고서가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기조를 이뤄왔다. 한때 일본에 밀린다고 엄살을 떨던 것을 떨쳐버리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바탕 위에 꾸준히 성장한 미국의 기초과학 기술력이 튼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에도 미국이 계속 세계의 영도국이 되기 위해서 국가 과학기술 전략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민주당 행정부와 공화당이 다수인 의회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어 왔다. 1997년 미국 105대 의회는 깅리치 하원의장의 의뢰로 하원과학위원회가 「국가과학정책연구」를 시작했다.

이번 한, 미 포럼에는 이같은 보고서 작성을 제안한 깅리치 의장은 나오지 않았지만 과학위원회 위원장 센센브레너 의원(공화), 연구보고 책임자인 부위원장 에일러스 의원(공화, 핵물리학자) 그리고 전 위원장인 브라운 의원(민주) 등이 참석, 기조연설 및 발표를 통해 앞으로의 미국 과학기술 정책기조의 개요를 들려주었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의회정치에서 과학기술을 담당하고 있는 의원 3총사가 참석한 셈이었고, 한국에서도 강창희 과기부 장관(자민련), 전 과기부 장관인 이상희 의원(한나라), 장영달 의원(국민회의) 등이 참석해 의원외교의 본보기가 됐다.

올 7월에 발표될 이 의회 보고서에서는 연구개발 지원에 대한 정부의 역할, 국제 과학기술 협력, 과학문화의 확산, 그 중에서도 초, 중, 고교에서의 수학과 과학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리라 한다. 21세기 정보사회는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과학기술을 모르는 국민을 가지고서는 세계를 영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부족한 고급두뇌는 이민으로 귀화한 과학자로 채울 수도 있지만 과학에 무지한 국민을 가지고서는 미국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이야기 같지만 바로 이것을 국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꼬집어내는 미국 지도층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경제개발의 수단으로 과학기술을 단편적으로 다뤄왔고 일부 과학자들이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먼 훗날이나 남의 일처럼 넘어가곤 했던 것에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미 포럼의 회의장은 의회 청문회장으로 쓰이는 방이었는데, TV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질문자인 의원석이 높이 배치된 그 앞에 대답을 할 사람들의 좌석이 마주보고 배열돼 있었다. 그리고 의원석의 벽면에는 테니슨의 시 한 구절과 구약성서 잠언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두 글귀의 공통어는 비전으로서 「비전이 없으면 멸망하게 마련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미국은 정치 지도자들이 앞서서 과학기술 비전을 강조하는데 한국은 어떠한가.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자들은 어떤 비전을 우리 정치지도자들에게 주창하고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기회도 됐다. 사회적 책임감과 함께 정치적 식견이 있는 과학기술자가 필요하다는 센센브레너 위원장의 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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