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특강] 경쟁정보활동과 산업스파이

田炳文

83년 서울대 법과대학 법학사

83년 3월∼83년 8월 김평우 변호사사무소 연구원

86∼95년 한일리스금융 근무

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MBA(경영정보)입학

98년∼현재 익제큐티브 대표

얼마 전 반도체기술 스파이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전국의 여론은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 범법자는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였으며 여기에 언론이 큰 몫을 했다. 그러나 불과 몇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오늘의 상황은 어떠한가. 지나간 사건으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정보 전쟁의 역사는 짧지 않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손자는 2천여년 전에 이미 정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 (적을 알고 우리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라는 정보전쟁의 의의를 설파했다.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세계는 지금 과거의 군사 외교전에서 산업 경제전으로 전장이 바뀌었다. 적과 우방이란 이념 대신에 국익이라는 새로운 논리가 제기됐다. 산업 경제전을 통해 경제적 경쟁우위를 단숨에 창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부를 축적하여 국제사회의 주도세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 일본, 유럽제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정부 주도로 경쟁국가 및 기업에 대한 첨단기술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합법, 비합법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도 외국을 상대로 산업스파이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95년 미국 외교관 등 5명에 대해 간첩 혐의로 본국 소환을 미국정부에 요구했다. 이들은 92년부터 총리실 정보통신부 등 정부와 국영 프랑스텔레콤 등의 고위 공직자들을 매수해 정치동향은 물론 정보통신, 우주, 국방, 항공, 신소재, 생명공학 등 첨단산업 분야까지 광범위한 첩보활동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체계적 정보수집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일본의 경쟁정보 활동의 주축은 정부기관과 무역회사이다. 특히 한국기업과 경쟁관계에 있는 일본 기업들은 첨단기술분야에서 치밀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한국주재상사원, 협력사 파견인력, 일본무역진흥협회 (JETRO), 한국진출 기업연구소 및 신문사 특파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경쟁자를 의식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기업은 독점기업이나 니치 시장을 확보한 유일기업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이며 모든 기업활동은 경쟁을 전제로 한다. 경쟁우위를 위한 정책결정에는 경쟁환경과 경쟁사 전략 이해의 토대가 되는 정보의 입수, 분석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경쟁정보(CI:Competitive Intelligence) 활동의 존재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데이터의 전달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는 글로벌 경제상황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보(Information)가 아니다. 단순한 정보를 행동에 필요한 정보(Intelligence)로 전환하는 것이 경쟁정보 활동의 핵심이다.

경쟁정보는 조직적이고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경쟁자의 활동과 기업의 경영환경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 활용하는 체계적인 프로세스이다. 경쟁정보는 기업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한다. 경쟁정보 활동은 리스크를 미연에 방지하고 기업에 닥친 위협과 기회를 탐지하며 대책을 위한 적절한 타이밍을 제시하고 정책 결정권자에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경쟁정보 활동은 산업스파이와 같은 불법적인 접근법보다 훨씬 저렴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경쟁사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이며, 실제 세계의 대다수 주요 기업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행위이다.

역사적으로 경쟁정보 활동의 중요성이 지금처럼 절실히 부각된 적도 없다. 특히 21세기 세계 기업으로의 성장이라는 길목에서 IMF 상황이라는 최대의 위기에 발목이 잡힌 한국기업에게 경쟁정보활동은 새로운 기업경영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기업경영 활동의 방식인 것이다.

경쟁정보 활동을 정보수집을 위한 스파이 활동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경쟁정보 활동은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경쟁사의 강약점, 의도, 경쟁환경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 활용하는 시스템적인 프로세스이다. 실제로 경쟁정보 활동 전문가들은 기업이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의 90%가 공개된 소스를 통해 확보할 수 있고 나머지 10%도 입수된 정보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경쟁정보 활동은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기본적인 것 외에 전쟁게임, 데이터 마이닝, 기술 스카우팅 등 다양한 도구, 테크닉, 방법론을 활용하여 단순한 경쟁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 전파하는 이상의 전문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활동이다. 정보는 신문, 저널, 인터넷, 상용 데이터베이스, 기업이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판매요원, 공급자, 고객, 산업관련 단체 등을 통해 입수한다. 산업박람회나 컨퍼런스도 중요한 정보 소스이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소스와 테크닉을 통해 수집된 정보는 과학적 분석 과정을 거쳐 필요한 시기에 정책결정자에게 전달되어 정책에 반영된다. 이것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경쟁정보시스템이 필요하며 이것은 각 기업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경쟁정보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 경영자의 관심사이다. 아무리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경쟁정보가 수집, 분석돼도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경쟁정보 활동은 어떤 일회적인 활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프로세스이므로 이것이 조직의 전 부문에 내재화하기 위해서는 경쟁정보에 대한 최고경영자의 마인드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이미 일본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에서는 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쟁정보 활동을 기업경영의 중요한 무기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경쟁정보라는 개념조차도 사실 최근에 와서 극히 일부 그룹 내에서만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우리 기업들이 지금까지 정부의 보호아래 비교적 순탄하게 경영을 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결과가 오늘날 IMF상황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제 이러한 보호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경쟁정보 활동은 가시거리 제로의 글로벌 경쟁속에서 우리나라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경영활동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발전에 맞추어 우리나라의 기업도 지난 수년간 기업의 정보화에 박차를 가해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업무 전산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정보수집과 활용의 중요성을 인식한 기업의 경우에도 자료의 축적과 물리적인 전달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정보의 폭발로 대표되는 이 시대에 이제 수집되어 축적되는 정보는 기업의 중요한 자원이 아니라 짐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들의 경쟁정보 활동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실시한 50대그룹 기조실, CIO포럼, CTO클럽회원 등 15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해보면 우리기업들의 경쟁정보현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결과에 따르면 우리 기업인들의 경쟁정보 마인드는 선진국에 비해 매우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국기업들에 비해 경쟁정보 전문부서 및 경쟁정보시스템이 미비되어 있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중 경쟁정보시스템 보유기업은 19%로 미국의 82%에 비해 현저히 적고 경쟁정보활동 비용을 투자개념이 아닌 단순비용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97년 세계경쟁정보전문가협회(SCIP)는 미국 기업들 중 경쟁정보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한 상위 랭킹을 발표했는데 1위는 마이크로소프트, 2위 모토롤러, 3위 IBM, 4위 프록터&갬블, 5위 GE, 6위 HP, 7위 코카콜라, 8위 인텔 등의 순이었다. 경쟁정보활동과 우량기업의 상관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좋은 근거다. 이번 국내 유수의 그룹 기획조정실과 CIO 포럼 및 CTO 클럽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처럼 우리 기업들의 경쟁정보 활동은 아직 미약한 수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쟁정보 전담 부서가 있는 기업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효과적인 경쟁정보 수행을 위한 시스템 개발도 제대로 돼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쟁정보 프로세스가 정립되어 있지 않음도 물론이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정보 마인드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업스파이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정보를 정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더 이상 정보활동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행위는 바로 범죄행위가 되는 것이다. 지속적이고 합법적인 경쟁정보 활동으로 공개된 정보를 수집하고 고도의 분석기술을 통해 숨겨진 정보의 실체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경쟁정보활동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범국가적인 경쟁정보 수집 네트워크가 구성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 스스로의 노력이겠지만 국가차원의 지원이 중요하다는 것은 선진국의 사례에서 이미 확인됐다. 둘째, 수집된 정보의 공유체제가 정비돼야 한다. 국가든 기업이든 정보 수집 노력은 활성화되고 있는데 반해 공유가 제대로 되지 못해 낭비요소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기업에서 정보는 자금과 더불어 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연결되어 흘러야 제 효용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경쟁정보 분석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각 기업의 정보요구는 제각각 다를 것이다. 모든 기업의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는 정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보의 흔적이나 단편은 곳곳에 널려있다.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분석하면 정보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보분석 기술이다. 넷째, 경쟁전략에 반영해 경쟁우위를 창출해야 한다. 경쟁력 제고에 도움이 안되는 정보는 가치가 없다. 따라서 단순히 정보라고 부르지 않고 경쟁정보라고 하는 것이다. 경쟁정보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경쟁우위의 창출에 있고 이는 분석된 경쟁정보를 활용하여 효과적인 경쟁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다섯째, 경쟁정보 프로세스 및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경쟁정보 활동은 일회적인 노력으로 효과가 나타날 수 없다. 경쟁정보 대상인 변화나 기술, 전략 등이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정보 또한 수명주기라는 것이 존재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경쟁정보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경쟁정보 프로세스를 정비하여 지속적으로, 시스템을 활용해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쟁정보 보안, 규제 체계의 구축이다. 경쟁정보 활동의 주요한 또 하나의 축은 경쟁정보 보안이다. 경쟁정보를 수집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기업의 핵심 지식 자산에 대한 보안은 정보수집 활동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아울러 현재 논의되고 있는 산업스파이 규제법안 정비방향과 관련하여 한마디 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은 산업정보 측면에서 볼 때 보호해야 할 산업기술이나 지식보다 선진제국 기업으로부터 확보해야 할 산업정보가 더 많은 형편이다. 미국이 산업스파이 방지법(Economic Espionage Act)이라는 특별법을 제정해 외국의 산업스파이 행위를 규제하려는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다. 일본이 아직 미국의 산업스파이 방지법 같은 산업스파이 규제법이 없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민간기업의 경쟁정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보호해야 할 정보가치의 양, 수준, 분야 등을 고려하여 기존 법률체계를 수정, 보완하는 정도가 어떨까 한다. 그리하여 외국이나 국내기업간의 부당한 산업스파이 활동을 규제하면서도 경쟁력 제고를 위한 경쟁정보 활동을 촉진하여 국내 기업들의 경쟁우위 노력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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