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새로운 바람이 부는 듯했다.
실제로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바뀌었으니 무엇인가 달라질 것 같지만 생각이 옛날 그대로이면 새 것이 나올 리 없다. 또 혁신이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사기업도 웬만한 규모면 경영혁신에 10년이 걸리는데 한 나라의 변혁이 2, 3년에 되리라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변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30년을 내다보고 추진하되 몇 년 안에 기틀이라도 마련해 다져둔다면 장하다 할 것이다.
어느 날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이것저것 생각한 적이 있다. 평소대로 아침 뉴스를 듣고자 TV를 켜자 화면과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다른 방송국으로 돌려 보아도 같은 현상이었다. 얼마 전에 케이블TV 방송에 가입했기 때문에 지역방송회사로 곧 전화를 걸었다. 숙직사원인가,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린 끝에 잠에서 미처 깨지 못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첫 마디가 왜 이른 새벽에 이런 전화를 거는가 라는 것이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방송이 나가고 있으면 밤낮을 불문하고 그때가 바로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의 근무시간이 아니겠는가. 또 시청자를 고객이라 생각한다면 응대하는 태도도 그럴 수는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첫째로 유선방송이란 사업이 정부의 인허가 사업이라는 데에 있다. 정부의 인가 또는 강한 규제를 받는 사업이 대체로 그렇듯이 유선방송사업도 일정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 다른 경쟁자가 그곳에 침범해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실질적인 뜻의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객과 비슷한 대상은 있으나 굳이 서비스를 경쟁자보다 잘해서 고객을 확보할 필요까지는 없고 또 고객은 어디로 빠져나가지도 못한다. 크게 보면 역시 지역별 방송사간의 우열이 가려지기 때문에 기술 육성이나 인재 양성이 전혀 도외시될 수는 없지만 경쟁이 심한 업종에 비하면 좀 느긋하게 마련이다. 감독하는 기관의 눈치만 잘 살피면 사업이 되니 사회주의 국가들의 기업들이 그랬듯이 일하기는 편하나 체질이 약해서 경쟁상태에 놓이면 맥을 못추게 된다.
경쟁을 기본으로 삼는 시장경제체제 아래서도 국, 공익 때문에 산업별로 경쟁을 일부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경쟁제한 내지 규제를 신중히 적용하지 않으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거나 과보호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공정거래의 보장 외에도 인허가 보호를 받는 사업들의 관리감독을 위한 제도와 기관이 마련돼 있다. 그 제도나 기관이 제 격식대로 기능만 해준다면 말할 것 없으나 매사가 원칙대로 가지 않는다. 규칙이 잘못됐다는 변명도 있으나 한번 정한 법이나 규칙은 철저히 지켜보다가 잘못된 점이 있다면 고쳐서 지키려고 힘써야지, 애당초 못 지킨다고 피해가서도 안되고 못 지킬 그런 규칙을 만들어서도 안된다.
선진국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관습상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이웃 사이에도 규칙위반이 있으면 인정사정 없이 고발을 당한다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법 준수의 버릇도 들었지만 자기 권익을 보호받는 데에 매우 민감한 것이다. 우리 같으면 고객으로 조금 푸대접을 받아도 귀찮아서 참아 넘기고 마는데 그것이 반드시 인정 많은 미풍양속이라 할 수는 없다. 잘잘못을 서로 가리고 규칙을 누구나 준수한다는 것은 현대 경쟁사회에서는 인정 이상으로 중요한 덕목이 된다. 기업과 그 종사자가 고객을 존중하고 감독기관이 원칙 이행을 보장하고 소비자가 자기권익을 법에 따라 보호받을 줄 아는 그런 사회가 체계적으로 잘 짜여서 돌아가면 비로소 변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방된 사회에서 이겨서 살아 남고자 한다면 경쟁에 강해야 된다. 그러려면 규칙이 뚜렷이 서야 하고, 모든 관계자가 그 규칙을 지켜나갈 의무를 져야 된다. 저 사람은 지키되 나는 안하고 아랫사람에겐 하라면서 윗사람이 안 지킨다면 참된 변혁을 그 사회에서 바랄 수는 없다. 어쩌면 이것은 국민교육의 문제요, 또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李憲祖 LG전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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