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신호등, 김지호 실장은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천천히, 기다린 시간을 보상받듯 여유있게 걸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통제실 자동절제시스템과 위성까지 장애를 일으켰다는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야. 우연이 아니라면 은행에서 돈을 불법으로 인출하기 위해 사고를 일으켰다고 볼 수만은 없어. 이번에 적용된 기술능력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조직이라면 은행의 돈을 불법으로 인출하는 데 자동절체시스템과 위성에까지 장애를 일으켜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실장님, 돈이 어떤 사람한테로 입금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어. 은행 내부정리가 덜 된 모양이야."
"요사이 은행마다 김시용 카메라가 있을테니까, 돈을 인출한 사람의 모습을 바로 찾을 수 있을 텐데요. 50억이라면 무지 많은 돈일 텐데요."
"1백 군데의 은행에서 인출되었대. 한 군데서 5천만원씩, 1백 군데의 은행에서 인출된 거야."
김지호 실장과 김 대리는 청진동 해장국골목으로 들어섰다. 늦은 아침이었지만 해장국집에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맨홀에서 치솟던 불길은 이제 그들의 관심이 아닌 듯했다. 지금 자신들의 전화가 이상이 없으면 그 맨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통신매체란 이처럼 평상적인 때, 즉 정상적으로 통화가 가능한 경우에는 존재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다가 이상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의도에 부합되었을 때 의미와 가치를 확인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가치가 확인되는 경우는 대부분 장애가 발생한 상태, 잘되면 당연한 것이 되고 잘 안되면 온통 난리를 치는 것이 바로 통신매체인 것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고 자신에게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김 대리, 식사하고 창연오피스텔 아래 맨홀에서 고장수리 작업을 한 직원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게나."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김지호 실장은 김 대리가 연락을 취하는 동안 여러가지 생각에 빠져들었다. 승민의 글이었다. 어서 빨리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망설여졌다. 창연오피스텔 아래 맨홀을 먼저 확인하고 현미와 다시 통화를 해본 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연오피스텔.
또 다른 생각 하나는 창연오피스텔 2020호실이었다.
현미의 친구가 죽은 1820호실 컴퓨터에서 빠져나온 전선이 인입된 2020호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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