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시간에 쫓겨 학교 앞에서 급히 자장면 한 그릇을 먹고 돈을 내려 하는데 지갑에 달랑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밖에 없었다. 가게주인이 IMF 때문에 장사가 안돼 잔돈이 없다며 바로 앞에 제일은행이 있으니 가서 좀 바꿔와 달라는 것이었다. 은행 여직원이 수표를 보더니 조흥은행 수표라서 안된다며 한 10분쯤 걸어가면 조흥은행이 있으니까 거기서 잔돈으로 바꾸라고 해 나는 무심코 앞집 구멍가게에 가서 사이다나 한 병 사고 잔돈을 바꾸면 되겠다 싶어 은행을 나오려는데, 고객을 위해 마련된 멋진 가죽소파 위에 놓인 신문에 큰 글씨로 쓰인 「외국은행의 한국진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발길을 돌려 아까 그 여직원한테 지점장좀 불러달라고 했다.
물론 지점장은 거기에 없었다. 과장 박아무개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있던 그는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를 만원짜리로 바꿔달라는 나에게 타 은행의 것은 여기서 바꿀 수 없다며 『아시아나 비행기표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탈 수 있습니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구멍가게에서도 어떤 은행의 자기앞수표라는 것에 상관없이 현금으로 바꿔주는데 정작 수표를 발행한 은행에서 자기은행, 타 은행을 구별하는 이유는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일장 훈시를 해가며 어려운 말을 한가득 쏟아내는 것이었다. 요약하면, 타 은행 자기앞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제일은행의 통장을 개설한 후 입금시켰다가 내일 오후 2시 이후에 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원칙이지만 그러나 잘 알고 있는 거래처나 교수같이 신분이 확실한 경우는 소위 「추심전 지급」이 가능하므로 주민등록증과 교수신분증을 보여주면 자기앞수표를 발행한 조흥은행에 전화로 조회한 후 현금으로 바꿔주겠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에 나는 화가 났다. 우선 『그냥 안되니 가라』고 몰아붙이는 은행여직원의 무성의한 서비스이고 다른 하나는 『교수니까 봐 드릴 수 있다』는 그 과장의 태도다. 민초들에게는 은행이란 돈은 맡기고 필요할 때 찾는 곳이지 자기집 앞의 은행이 조흥은행인지 제일은행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은행의 기본업무는 지역주민들에 대한 봉사다. 그러나 이를 뒷전으로 하고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원칙을 은행들끼리 정해놓고는 상황에 따라 봐주고 안 봐주는 관행은 진정 외국의 은행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봐준다는 것인가. 멋있는 소파를 객장에 비치한 것으로 고객을 위한 서비스인 양 하는 국내은행들이 사인 하나로 현금화할 수 있는 선진국들의 은행과는 경쟁이 될 리 없다. 자기앞수표를 지방에서 쓰려면 추심료를 따로 내야 하는 우리네 은행 시스템은 국민을 위한 서비스기관이라는 기본개념조차 없는, 돈을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저희들끼리 싸우는 우물안 개구리라 아니할 수 없다.
잘은 몰라도 자기앞수표라면 그것을 지닌 사람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단골고객이든 아니든 즉시 현금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앞수표가 아닌가. 자기네 은행에서 발행한 것이라야 즉시 현금화해 주는 제일은행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민초들의 예금을 은행장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한보철강에 거액 대출을 해 준 바로 그 은행이다.
나는 자기앞수표를 조회해야 한다며 통화중인 전화를 계속 붙잡고 있는 그 은행 여직원 옆에 한참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결국 박 과장이 오더니 『그냥 바꿔드려』라는 말을 듣고 나는 또 무심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중국집으로 갔다.
<주승기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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