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수행하고 있는 통신업무의 중요성과, 나라의 존망이 달린 그 통신매체가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일본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가장 현실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당시 통신인들은 안타까움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김지호 실장도 같은 느낌이었다.
30만 회선. 특히 우리나라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30만 회선이 두절되었던 이번 사고에서 그 당시 통신인들의 안타까움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소름이 돋는 안타까움을 느꼈던 것이다.
아현고개를 넘어서자 말갛게 솟아오른 태양이 보였다.
태양. 차창으로 늦가을의 싱그러운 바람이 밀려들고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통신피탈 당시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통신권을 지키기 위한 대신들과 일반 국민들의 저항운동은 또다른 사건 때문에 주춤해졌다. 바로 러시아로 보내진 밀서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국왕 고종은 때마침 자신이 러시아로 보내기 위해 작성한 밀서가 상해에서 일본 관리에 의하여 탄로남으로써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일본은 그 사실을 들어 밀서 발송은 「한일협약」에 대한 분명한 배반이라고 그 책임을 추궁하면서, 그 문제를 그들이 요구한 통신권 위탁 및 외국공관 철수문제와 관련시켜 흥정거리로 삼았다.
하지만 고종이 러시아로 발송한 밀서의 내용이나 그 휴대자 또는 발송경로 등이 분명하지 않으며, 또 고종은 그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따라서 그 밀서사건은 처음부터 고종의 반대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조작한 사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을 가지고 일본공사 자신이 말한 바대로 『본건에 관해 그 내용을 한국 황제에게 대질해 두는 것은 목하 현안 중의 통신기관 위임 및 재외공관 교섭을 진행시키는 데 다소의 효력이 있을 것을 인정하고』 심히 고종을 괴롭혔다.
이같은 일본의 압력이 얼마만큼 고종의 태도에 작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3월 28일 참정대신 조병식의 사표가 수리되고 민영환이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참정대신을 교체시키는 데 성공한 일본은 의정부 회의의 개최를 강력히 요구하였고, 고종은 마침내 이를 칙령으로 하명하기에 이르렀다.
1905년 3월 30일.
마침내 의정부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는 일본공사가 직접 참석하여 통신권 위탁을 위한 협정의 찬성의결을 강요했다. 무언의 압력과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회의장 대신들을 위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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