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중에는 세상사람들이 비슷하게 사용하는 엄마, 마마, 마미 같은 호칭에서부터 우리 민족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독특한 이름들이 있고, 민들레, 종다리, 풀피리 같이 이름만으로도 향긋한 봄내음이 느껴지는 명칭들도 있다. 이같이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름은 사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기능과 함께 감각의 공유를 돕는 작용도 한다.
더구나 태어나는 자녀의 이름자 두 자 중 항렬자를 뺀 한 자를 정하려고 이웃 어른을 공손히 찾아뵙고 부탁을 드리거나, 역술가에게 복채를 주고 좋다는 이름자 한 자를 받아다 자녀의 이름을 지어 부귀영화를 빌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 강제된 창씨개명을 했다 하여 항일 독립투사 반열에서 배제시키기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사람의 이름에 대해 어느 민족보다 더 강한 애착과 집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에 뒤진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앞선 서구 문물을 일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선진 문물과 관련돼 대량으로 도입된 낯선 이름들이 우리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게 됐다. 이런 용어 중에는 잘못 쓰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도 있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지속돼 우리 마을 이름 찾기, 행정용어 순화작업, 법령 개정작업 과정 등을 통해 어려운 용어나 한문으로 된 동식물 이름들이 점차 우리의 고운 이름으로 바뀌고 있음은 다행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새로 짓는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얻어야 하고 쉽게 이용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한번 지어진 이름을 고치기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신중히 선택돼야 한다. 그러나 그간 선진국의 기술이나 제도를 도입할 때 사용된 용어들을 보면 대개 작명과 관련된 학자나 단체가 한자문화권에 가까운 경우는 일본식 용어, 영어권에 가까운 사람들은 미국식 용어를 사용해 왔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라는 용어를 우리 대다수가 이미 이해하고 있지만 이를 들여오면서 우리말로 이름지을 당시에는 일본에서 전자계산의 의미로 사용하던 「전산(電算)」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컴퓨터가 단순한 전자계산기능에서 나아가 다기능화한 지금에 와서 보면 중국이 전자두뇌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된 「전뇌(電腦)」라는 이름이 좀더 미래지향적이고 적합한 작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또 지난 85년 LAN이란 용어를 도입할 당시 우리나라 전기통신법 체계가 장거리, 시내, 구내로 구분돼 있었고 구내에서는 법의 규제없이 통신망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내정보통신망」으로 정한 바 있으며, 최근에 선보인 비디오 콘퍼런스(Video Conference)나 비디오폰(Videophone)은 환등기와 같이 단편적인 장면을 보는 듯한 「화상」이라는 개념 대신 TV를 보는 것과 같은 영상의 개념으로 「영상회의」 「영상전화기」 등을 표준으로 정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은 홍보부족 탓인지 모르나 일부에서는 이렇게 정해진 표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사용되는 「근거리통신」이나 「화상회의」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외국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다고 하는 일본에는 범정부적인 조직이 있어 자국 내에서의 용어사용에 혼선이 없도록 외래용어에 대해 즉시 표준어를 정해주고 있다는데, 우리의 경우는 우리에게 알맞은 표준어를 정하고 사용하는 노력에 다소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우리나라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통신분야 후진국으로 출발해 불과 수십년 만에 압축성장을 거쳐 통신 선진국에 이르는 놀라운 발전을 했다. 이제 우리 정보통신산업은 고루 축적된 인적 자원과 자신감,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어 어느 첨단산업분야보다도 성장발전이 기대되는 분야다.
특히 많은 특허가 출원되고 있는 정보화와 무선통신 기술개발분야나 사업경쟁이 치열하고 틈새시장 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는 통신서비스분야에서 먼저 세계 첨단기법이 도입돼 우리가 이름을 지을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 정보통신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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