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빛이 한강으로 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버들잎이 흔들거렸다.
김지호 실장은 다시 한 번 길게 담배연기를 발아들이며 통제실 안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이어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들이 가설한 군용전선의 불법성을 조금이라도 불식시키기 위해서 1894년 9월 22일, 서울인천, 서울부산 간의 군용전선으로 조선의 공중전보(公衆電報)를 취급할 용의가 있다고 제의하였다.
조선정부에서는 곧 응낙하였지만, 일본은 11월 15일에 가서야 실제로 업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용선을 이용한 일반인의 전보취급 제안은 조선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군용선에 의한 일본인들의 전보취급을 합법화시켜 조선에 출정한 군인이나 거류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전보는 일본글자에 국한되어 한글이나 한문의 전보문은 접수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군용 통신시설은 조선에 아무런 편의를 주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직접 이용할 수도 없는 외국군의 시설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고, 더욱이 그 시설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타도하려는 민족 저항세력을 유린하고 강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서 조선에서는 전선을 파괴하고 절단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전선의 파괴활동은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은 물론이고 을미사변이라 일컬어지는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난 1895년과, 대대적인 의병활동이 있었던 1907년 이후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이에 일본에서는 전선의 절단을 금하고, 그 범인의 엄단을 조선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전선파괴 행위는 처음 동학농민군의 영향하에 있던 서울과 부산을 잇는 통신선에만 해당되었지만, 일본이 조선 내 대부분의 통신시설을 관리하게 된 후부터는 그 절단사고가 광범위해지고 더욱 심해 졌다. 1904년 9월 중에는 황해도 봉산인(鳳山人) 장원석이라는 사람이 전선을 절단하였다는 혐의로 국가반역죄인에게 가하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11월에는 전선 절단사고가 발생하면 마을사람 전체에게 연대책임을 물게 하여 절단사고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붉은 빛이 한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알맞게 차가운 바람.
김지호 실장은 다시 한 번 길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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