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351)

전주에 입성하여 전주 전보국을 자신들의 도회소로 삼은 동학농민군들은 전기통신에 관련된 내용을 정부와 화해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보는 다폐민문(多弊民問)하니 철파(撤罷)할 사」

정부에 요청한 폐정개혁 요구조항 가운데 동학군들은 「전보는 다폐민문하니 철파할 사」라는 항목을 넣고 있다. 동학농민군들이 전보의 철폐를 요구한 것은 전보가 그동안 민중을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불신 때문이었다. 전신선로의 가설에 따른 전주의 공출, 부역 등으로 민폐가 심하였기 때문에 이 점을 활용하여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실행에 옮긴 동학농민군들은 전선과 전봇대를 닥치는 대로 끊어버리고 잘라버렸다. 이로 인해 호남지역을 통과하는 남로전선은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남로전선은 동학농민군의 철수 후에도 선로의 보수가 여의치 못하여 1897년 12월 전주전보사를 재개할 때까지 한성-공주 간의 통신만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편, 동학농민군들의 봉기를 빌미로 1894년 5월부터 각기 군대를 진주시켜 군사적인 각축을 벌이던 청국과 일본의 세력다툼은 점차 전쟁을 각오하고 조선으로 진주한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이미 동학농민군은 자진 후퇴하여 군대가 계속 주둔할 명분이 없었으나 일본은 조선과 청국이 같이 요구한 청일 양군의 동시 철수에 끝내 불응하였다. 그들은 동양 3국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조선의 안정이 필요하고 그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내정개혁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조선의 내정개혁이 완수될 때까지 그들은 철수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이러한 주장과 강압은 국제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침략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정당한 논리로 이를 공박하였지만, 이미 침략전쟁을 각오한 일본의 트집과 군사적 압력 앞에는 모든 것이 허사였다.

찌르릉.

짧게 경보음이 울렸다.

김지호 실장은 경보장치를 확인했다. 영등포 지점의 장애표시 경보.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보였다.

쭉 늘어선 모니터를 확인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원세개(袁世凱).

김지호 실장은 청일전쟁 당시 청국의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袁世凱)를 떠올렸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조선에 들어와 서울에 주재하면서 1885년 조선의 인천에서 시작되어 서울과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과 연결된 전신선을 가지고 온갖 횡포를 다 부렸던 인물이었다.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