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늘 일본이 불안했다.
다른 기술에 대해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앞서 있었지만 통신기술에 관한 한 유선과 무선 모두 대등한 상태에 있었다. 통신의 핵심인 전자교환기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개인휴대통신, 광케이블 등은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는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정상적인 전쟁을 치르지 않는 나라였다. 지금 김지호 실장이 보고 있는 요람일기가 쓰여질 당시인 러일전쟁 때에도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 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여순항을 공격했다. 그 이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국 함대를 기습 공격했고, 진주만 공격 때에도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길잡이다. 역사 인식이야말로 올바른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김지호 실장은 늘 일본의 그러한 특성을 우려했다. 그것은 역사였다. 정상적인 경쟁이라면 중국 통신현대화사업에 대한 사업권 획득이 가능한 상태였지만, 요람일기에서 보듯이 일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간교함이 우려되는 것이었다.
김지호 실장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의 상황들을 떠올렸다. 진기홍 옹에게서 들은 내용으로, 부분부분에 일본의 간교함이 드러나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양 3국의 전기통신망은 크게 보아 중국의 상해와 일본의 장기(長崎)간을 연결하고 다시 러시아까지 이르는 해저전선과, 중국 상해로부터 천진-봉천을 거쳐 의주에서 조선의 서로전선과 연결되어 한성에 이르고, 다시 남로전선을 통과하여 부산에서 해저전선으로 일본 장기까지 이어지는 전선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의 통신망은 동양 3국을 연결하는 2대 간선중의 하나였던 만큼 그 중요성과 의존도가 매우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우리나라는 물론 청국과 일본의 통신망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난 노도와 같은 동학농민군들에 의해 호남이 완전히 유린되고, 급기야 전주도 점령당하게 되었다. 1894년 4월 27일 동학군이 전주 외곽에 당도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동학군이 방금 전주로부터 30리 지점까지 당도하여 잠시 멈추고 있다」라는 내용의 마지막 전보를 조정으로 보낸 뒤 성을 비우고 도주하고 만다.
이 전보를 마지막으로 전주와 중앙 조정과의 전보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이어 다음날인 4월 28일에 동학군은 저항 없이 전주에 입성하고 전주전보국을 그들의 도회소(都會所)로 삼아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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