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가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자금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벼랑 끝에 몰려 있다. 공룡같이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기업이 잇따라 무너지는가 하면 일부 금융기관들도 긴급 수혈이 없으면 파산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부실화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파산 직전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방안을 자신있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1,2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본격화된 「벤처기업 육성을 통해 21세기를 준비하자」는 움직임이 벌써부터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것. 대기업들이 최근 대부분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해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벤처기업들은 「IMF 불황」에도 불구하고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대표적인 벤처기업인 메디슨은 올 매출액이 지난해 8백억원보다 무려 2배 가까이 늘어난 1천5백억원을 기록할 전망이다. 또 경상이익과 순이익도 지난해 각각 86억6천만원, 82억3천만원에서 올해는 각각 1백80억원, 1백52억원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 회사 재무팀 직원들은 최근 순이익 규모를 줄이는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팬택, 스탠더드텔레콤, 엠아이텔 등 정보통신 벤처기업들도 이동통신기기 시장이 확대되는 데 힘입어 고속성장을 계속하고 있고 SW벤처기업인 핸디오피스는 일본에 1천5백억원에 달하는 그룹웨어 소프트웨어 수출계약을 체결, 관련업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최근 대기업, 중소기업을 불문하고 대부분 IMF 한파로 빈사상태를 허덕이고 있는 것과 다리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작은 거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기술로 승부하는 벤처기업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효시는 80년 설립된 삼보컴퓨터로 보고 있다. 그 후 큐닉스(81년), 비트컴퓨터, 미래산업(83년), 메디슨(85년), 터보테크(88년), 한글과컴퓨터(89년), 두인전자(90년), 핸디소프트(91년) 등이 꼬리를 물고 창업하면서 「한국판 빌 게이츠 신화」의 꿈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통상산업부에 따르면 지난 11월말 현재 우리나라 벤처기업은 총 1천5백개사, 종업원 수자로는 7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작은 거인들」이 그동안 거둔 성공신화에 힘입어 벤처기업은 앞으로 우리 경제를 다시 한번 반석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넷스케이프 등 미국의 벤처기업들이 지난 80년대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미국 경제를 회생시켰듯이 우리나라에도 이들 1천5백여 벤처기업들이야 말로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신음하고 있는 우리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본지가 지난 4월부터 「벤처기업이 뛰고 있다」라는 주제로 매주 한번씩 국내 전자, 정보통신 분야 30여개에 달하는 유망 벤처기업을 집중적으로 발굴, 소개한 기사에서도 그 실현 가능성이 충분히 나타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최근 대덕 연구단지에서 연구원들이 잇따라 벤처기업을 설립, 짧은 창업기간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회사만도 반도체 장비 제조 및 설계 전문업체인 아펙스를 비롯해 20∼30개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흔히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로 통하는 출연연 연구원들도 창업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했을 정도로 벤처기업 창업 열기는 뜨겁다.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또 연구원, 교수, 학생, 직장인 등 거의 전 직종에 걸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 시리즈 기사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방위산업용 특수 컴퓨터를 개발하고 있는 「서울스텐다드」가 이 난을 통해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는가 하면 반도체설계업체인 「C&S테크놀러지」, 전자의료기기업체 「메디다스」, 레이저 시스템전문업체 「하나기술」 등 전문 벤처업체들도 이 난을 통해 소개된 직후부터 「무명」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국내 벤처기업계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들 벤처기업의 사무실을 들어서면 그 어느 곳에서도 최근 우리 경제 곳곳에서 겪고 있는 불황의 그늘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들 벤처기업이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한데다 감량경영을 일찌감치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백승하 서울스텐다드 사장은 『벤처기업들은 대부분 자금력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6개월마다 시장동향에 맞는 신제품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마케팅, 자금관리 등 회사 운영에 필요한 각 단위조직들도 모두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벤처기업들이 모두 이들처럼 순항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벤처기업계 역시 IMF한파의 영향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1호 박사 출신인 이범천씨가 지난 81년 설립, 그동안 삼보컴퓨터와 함께 국내 벤처기업계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던 큐닉스컴퓨터가 지난 10일 부도를 내고 채권단에 화의신청을 해 놓고있을 정도로 국내 벤처기업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한국기술투자(KTB) 출신인 하정율 미디어링크 사장은 『자금동원 능력 측면에서는 여느 영세 중소기업들과 다를 바 없는 벤처기업들도 요즈음 언제 도산할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 때 국내 벤처기업계의 간판으로 잘 나가던 한글과컴퓨터, 가산전자, 두인전자 등이 최근 대대적인 조직개편 등을 단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지적하며 『한두번의 성공에 도취되어 조직을 크게 확대한 벤처기업은 어김없이 「IMF 한파」을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벤처기업인들중에는 IMF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일시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벌써부터 그 뒤에 숨어있을 기회를 적극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도열 하나기술 사장은 『IMF 등으로 기업체들의 투자가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에 레이저 시스템에 대한 수요도 최근 덩달아 뚝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곧 회복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기업체들이 신제품 개발의 생산성을 심각하게 고려하면 할수록 각종 각종 전자제품 등의 설계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우리 회사의 레이저 시스템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한국어 음성인식기술 개발회사인 인어기술의 방기수 사장도 『IMF 등의 영향은 가장 우선적으로 대기업들이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영화제작, 소프트웨어 개발 등의 사업에서 모두 철수하면 그만큼 벤처기업들의 활동영역은 확대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는 심지어 IMF가 최근 우리 정부에 긴급 금융지원을 해주는 전제조건으로 몇몇 은행의 폐쇄 등을 포함하는 금융개혁 등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경제개혁을 IMF가 대신 해주고 있다』며 『「IMF 금융통치 시대」를 맞아 국내 벤처기업들은 단기적으로는 자금조달 등에 어려움을 겪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낙후된 우리나라 금융 시스템 등의 개선에 따른 반사 이익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동원 한국기술투자 책임심사역도 최근 투자할 기업 사냥에 더 열심이다. 그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계열 창업투자회사들마저 기존 투자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을 때 어떻게 이처럼 공격적인 투자전략을 구사할 수 있느냐고 묻자 거침없이 『불황 등으로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진짜」와 「가짜」 벤처기업이 더 잘 보이는 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사실 그동안 국내 창투업에도 기술력이 대단하지도 않은 기업도 그것이 언론 등에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소개되기만 하면 액면가의 10∼1백배까지 프리미엄을 얹어주는 등 거품이 너무 많았다』며 『이제 그 거품이 완전히 걷혔으니 투자상담 등을 훨씬 더 차분하고 합리적인 선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본지가 지난 9개월동안 30여개 벤처기업을 발굴, 소개하면서 공통적으로 확인한 점은 한마디로 「벤처기업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벤처기업들은 IMF한파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고난뒤에 찾아올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우리 경제가 지금 극도의 불황을 겪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한줄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들 벤처기업이 있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서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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