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관람석]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 「증오」

당신은 무엇에 대해 증오를 느끼는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과 함께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면서 당신은 이제껏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언제부턴가 내면 깊숙이 묻어두기만 했던 증오의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증오의 대열」로의 동참이 끝날 때쯤이면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절망과 피곤함에 지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칸에서 당시 27세였던 마티유 카소비츠에게 감독상을 안겨주었던 「증오」는 흔히 비교되는 「트레인스포팅」보다 강하게 신경을 자극하며 가슴을 두드린다. 그 스스로도 『카메라가 연습장이고 학교였다』고 표현하듯 이 영화는 그의 세련된 재능과 자유스러움이 스크린에 폭발하듯 묻어난다.

「증오」의 배경은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서 20㎞ 떨어진 방리유. 이 곳은 프랑스가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아랍, 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양한 인종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형성된 집단거주지로, 미국의 할렘가처럼 범죄와 폭력의 온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인종차별과 소외의 틈바구니에서 이 곳의 젊은이들은 폐차처럼 버려진 인생을 산다. 그들에겐 직업도 돈도 미래도 없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한 청년이 프랑스경찰에 의해 구금된 상태에서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고 카소비츠는 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찰의 고문으로 16세 아랍소년 압델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이로 인해 시민과 경찰 사이에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진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카메라는 거리의 친구들인 유태계 빈쯔와 아랍계 사이드, 흑인 위베르의 24시간을 뒤쫓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환경과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결코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이 더러운 세상의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야 하는 공통점이 있다.

시위도중 경찰이 잃어버린 권총을 손에 넣게 된 빈쯔는 자신감에 차서 허세를 떨며 『압델이 죽으면 경찰을 죽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세 친구 중 가장 어른스러운 위베르는 그런 빈쯔가 위태로워 보인다. 시내로 간 이들은 몇차례 경찰과 부딪히고 위베르와 사이드는 아무런 이유없이 경찰에 붙잡혀 있다가 전철이 끊긴 후에야 풀려난다.

다시 만난 세명의 낙오자들은 전철이 다시 다닐 때까지 새벽거리를 쏘다니던 중 압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들의 24시간의 동행이 끝날 때쯤 빈쯔는 위베르에게 총을 건네주고 돌아선다. 그 순간 빈쯔와 맞닥뜨린 사복경찰이 실수로 빈쯔를 쏘고, 위베르와 경찰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눈다.

카소비츠 감독은 깊이있는 통찰력으로 현 사회가 지닌 체제의 폭력을 통렬하게 고발하지만 주절주절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욕과 수다스러운 불어를 자막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고역이다. 더구나 프랑스 흑백영화라는 이유만으로 선뜻 영화보기의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증오」는 그러한 곤혹스러움의 무게를 덜어주는 유머와 가슴을 뛰게 만드는 진실, 그리고 현란한 비트와 감각이 살아있는 영화다.

<엄용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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